전출처 : 바람구두 > 잔혹한 신의 선물, 자살
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가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죽음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책이 옮겨졌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원제는 "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이다. 말그대로 "잔혹한 신: 자살의 연구"인 셈이다. 얼마 전 나는 게르트 미슐레의 "자살의 문화사"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바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살 보다는 죽음(Thanatos) 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고, 공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논할 수 있으리요"만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사실상 한 몸이기에 나는 에로스의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셈이 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애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예술의 기본 재료들에 대한 탐구이다.

에로스는 궁극적으로 타나토스에 매혹되어 있으며 타나토스는 파괴의 신이자 동시에 생명의 신이란 점에서 언제나 에로스를 꿈꾼다. 모든 예술가들, 사람들에겐 근본적으로 생의 충동 즉 자기보존의 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에로스와 이에 대립되는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어로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죽음 충동이 있다. 타나토스란 결국 "삶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고, 에로스는 “자연에서 삶을 퍼 올리는 생식”을 의미한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으므로 당연히 섹스와 죽음은 모든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로 변주되더라도 결국 이 둘 사이로 귀결된다.

A. 알바레즈에겐 또 개인적으로 이런 극한의 경험을 한 사람을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의 서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이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라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시를 지은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며, 동시에 현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자살을 그는 가까이에서 목도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 보스톤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의 딸로 태어났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8살 때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비아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아홉 살 때 첫 번째 자살 시도를 벌인다. 대학시절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플라스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에 알게 된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실비아 플라스는 1962년 자신의 집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유일한 성공이자 실패였다고 A. 알바레즈는 말한다.

대개 책의 원제에 "Study"란 말이 붙는 책은 읽기 쉽지 않다. A. 알바레즈의 이 책은 자살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 자살이 생을 종결짓는 한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용인되었던 고대 희랍 세계와 문학, 자살이 죄악시되던 기독교 사회에 이르는 - 여러 사례들을 다룬다. 그러므로 나머지 장들을 모두 읽었다면(이건 분명히 약간의 엄살이긴 하지만) 당신은 자살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앞의 1장 부분 실비아 플라스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며, 그것으로도 제 몫을 다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옮긴 이인 시인 최승자는 우리에게 "개같은 가을"을 선사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번역은 대개 언제나 믿을 만하며,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비록 이 말이 그녀에게 찬사가 될 수 없음을 나 자신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왜 예술가들은 그토록 죽음에 대해 예민한 걸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의미 부여가 그들을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지표 생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즉, 어느 지역의 생태계에서 특정한 생물이 살 수 없다면 그 지역의 생태계가 어느 정도 파괴되고, 오염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그 생물 말이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명의 괴짜, 혹은 바보, 혹은 괴물이, (종종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견딜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병든 사회란 것을 의미한다. 한 명의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음에 맞먹을 치욕을 사회적 징벌로서 받게 된다면 그 사회는 병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A.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를 통해 문학과 죽음, 예술의 창조자이자 동시에 사회의 파괴자로 기능하는 예술가들의 상상세계에 죽음(타나토스)의 그림자를 연구했다.(내 딴엔 짧게 쓰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혹시 자살-행동으로 취할 자살 말고-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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