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이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일본 이야기
정구미 지음 / 안그라픽스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이런 만화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정구미"라... 어감이 쉽게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한국식 이름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 지식인과 그 사상 1980 - 90년대"을 썼던 윤건차 선생의 이름도 그렇다.  생각외로 한국에서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는 한자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정구미의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일본 이야기"란 만화책을 소개받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그런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 체험담을 다룬 책으로 생각했다. 사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나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책들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지만, 민족적 편견을 조장하거나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고 나름대로 객관적인 포즈를 취한 책들의 경우에도 과거사의 무게에 짓눌린 느낌을 전해받기 십상이다.

나는 지난 겨울에 인천 영종도에서 재일교포 3세를 만난 일이 있다. 우리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재일교포 3세, 그것도 재일조선적(在日朝鮮籍)이라 한국에 한 번 들어오려면 여러가지 절차를 밟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국적(nationality)이라 함은 국민으로서의 신분을 말하거나 국민이 되는 자격을 의미한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갖고 태어난 대다수 한국인들은 국적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백인들이 자신의 인종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과 같고, 남성들이 성차별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 이성애자는 자신의 성적 취향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백인, 황인, 흑인이라고 말하지만 백인들의 세계에서 백인은 색이 아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유색인종(有色人種, Colored People)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서구인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들은 백색을 색(color)으로 생각지 않으며 인종문제로 고민해야하는 것은 오직 유색인종들 뿐이다. (즉,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고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종종 왜 남성대학은 없는데 여대는 있고, 남성학과는 없는데, 여성학과는 있는가? 어째서 남성부는 없는데 여성부(그나마도 최근엔 남성들의 등쌀에 밀려 '여성가족부'로 명칭을 변경했다)는 있는가?를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은 경험이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스스로 차별을 자초한다는 주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일화가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강연에서 한 남성 청중이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질문했을 때 뤼스 이리가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연하지요. 세상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왜 여대는 있는데, 남대는 없나? 왜 여성학과는 있는데, 남성학과는 없는가? 왜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가?란 물음에 대해 뤼스 이리가레의 표현을 빌어 답하자면 "당연하지, 나머지는 전부 남성들 거잖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가 약간 딴 길로 조금 샜다. 최근 자주 듣게 되는 표현 중 하나가 '코시안'이다. 코시안이란 "코리아+아시안"의 합성어로 한국으로 이주해온 아시아계 외국인(대다수가 여성인)과 한국인의 결혼으로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코시안의 출현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차별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나는 진정으로 차별을 염려한다면 '코시안'이란 표현부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애인을 장애우로 부르는 행위와 흡사한데, 장애인에 대한 차별 자체는 온전시키면서 그들을 친구라고 호명하여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코시안이란 호칭 자체가 다른 각도로 보자면 그들이 "우리와 같은 '코리안'이 아니다"로 구분하기 위한 호명, 코리안으로 받아들이기 싫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의 경우 2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한국 국적을 취득할 자격을 얻을 수 있으며 2년이 지난 뒤에도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한 민족, 한 겨레를 자주 입에 담지만, 이때 말하는 한 민족과 한 겨레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일단 조선족 동포들이 제외되고, 사할린 동포들이 제외된다. 이들의 한국 국적 취득 문제는 물론 한국 방문 자체도 차별당한다. 그에 비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 이른바 재외 선진국 동포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같은 미국인이라도 백인은 선호되고, 흑인은 차별당하는 것과 흡사한 일이 한 민족, 한 겨레에 대해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에 더욱 복잡한 것은 바로 재일조선적(在日朝鮮籍) 동포다. 며칠전 EBS(2006.3.2)에서 "조선적을 아십니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이란 다큐 프로그램을 해준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조선적을 아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중국의 조선족을 먼저 생각한다. 재외동포 700만 시대,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중국의 조선족이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60만 재일동포들 중에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채 '조선'이라는 기호를 자신의 출신지로 삼은 이들(대략 13만에 이른다고 한다)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 시대 한반도에는 남한도, 북한도 존재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될 때 남한과 북한 어느 곳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의 국적은 그냥 조선이었다. 그러나 남한 사회에서는 이들을 총련계로 분류하였고, 2005년까지 이들의 한국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이 남한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통일된 조국이 생기면 그것이 당연히 자신의 국적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남한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남한 국적이 아니니 당연히 북한 국적일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일본과 북한은 아직까지 국교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 북한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차별을 받더라도 조선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이들이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며 왕래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적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하면 서울과 평양 어디든 일본 국적으로 편하게 오고갈 수 있다.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일본 이야기" 144쪽 '수학여행' 편에는 모국으로 수학여행을 왔던 구미의 경험담이 들어 있다. 5박 6일 일정의 모국 여행, 어딜 가든 그들은 어색했다. 불국사 여행길 창 밖으로 한국 남학생들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가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차창을 열고 환호하며 소리를 지른다. 반가운 마음에 창을 연 구미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반족발, 일본놈들아!"였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공항에서 구미의 여권은 대한민국 것이었으나 구미는 일본인 여권심사대를 이용해야 했다. 구미는 칸칸으로 막힌 만화의 한쪽에 이렇게 적어 놓는다. "이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구미의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일본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은 정직한 느낌, 그리고 편견없이 한.일양국을 바라보려는 열린 마음가짐에서 다가오는 신선함이다. 일본에서 재일교포 2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22년간을 성장한 구미는 그래서 스스로를 재일교포3세가 아닌 재일교포 2.5세라고 표현한다. 22년간의 일본 생활 때문에 그녀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함, 어색함도 느낄 만하고, 실제로 이 작품집이 담고 있는 내용의 원천 역시 그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 자신의 성장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작품집 어디에서도 기성세대라면 짊어졌을 법한 역사의 무게, 시대의 무게가 주는 묵직함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작품집에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는 신세대 감수성으로 충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구미는 누구보다 진지하지만 짓눌려 있다기 보다는 그 자체를 가볍고 신선한 변화로 받아들인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을 오랜 역사, 갈등 속에 놓인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단절을 이어주는 매개,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도리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해낸다. 그것이 구미의 이 작품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자 감동의 원천이다. 작지만 당당한 구미의 한국행이 후회없는 것이었길, 그것이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같은 인류로서 공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길 바란다. 또 내가 다른 이와 지닌 무수한 차이가 지닌 가치를 우리가 진실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폭력성의 원천은 차이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남과는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차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있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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