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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본 아놀드 하우저 - 4

이 책의 옮긴 이 가운데 한 명인 반성완은 이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지닌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유럽의 예술과 문학을 통사적으로 서술한 유일한 저서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항 ․ 필적할 만한 저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문학에 한정되어 있고 또 방법론을 달리하고 있지만 역시 통사적 성격을 띠고 씌어진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와 쿠르티우스(E.R.Curtius)의 『유럽문학과 중세라틴문학』과 함께 날이 갈수록 미시적 연구에만 빠져드는 제도권 중심의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사를 사회사적 시각에서 조감해보려는 문학도에게는 일종의 교과서적 역할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우저는 문학사가이기 이전에 미술사가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형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술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양식사적 현상, 즉 매너리즘을 셰익스피어 문학 해석에 적용시키고 있다든가 20세기 전위문학의 특성을 현대의 영상예술에서 찾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시각이 없었더라면 아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을 음악과 문학의 관련 속에서 보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의 특징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일반적 이론과 구체적 작품 비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잘 매개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보이는 몇몇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하우저의 뛰어난 실제 비평은, 그가 정해놓은 이론의 틀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사가 빠지기 쉬운 도식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술사가로서의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과 입장은 이론적 ․ 체계적 비평에 매우 강한 루카치와 개별적 예술품에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보는 것처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연결짓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연구나 예술연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하우저의 사회사(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 대로 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이 빠지기 쉬운 도식적 구성과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여러 사회학적 인식은 그에겐 예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적 현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요소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예술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예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면을 예술의 형식 내지 양식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과 자율성, 그리고 예술이 갖는 보편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뵐플린 식의 양식사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든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16세기의 매너리즘적 양식의 연속선상에서 고찰한다든가, 아니면 ‘예술의 종말론’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현대예술의 존립근거와 기능을 옹호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예술관의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연구방법론에 대한 그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놀드 하우저가 마르크스의 이론적 틀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과 경제환원론이 예술의 문제, 문화의 문제를 규정지을 수 있다는 입장에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은 문화연구의 입장과 흡사하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의 독일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영국의 문화연구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영국 내 신좌파의 반응으로 출현했다는 것과 묘한 일치를 보인다. 문화연구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계급간 헤게모니(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를 놓고 벌이는 대립과 충돌의 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문화연구에 대해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연구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과 더불어 성별, 인종적 혈통 등에 따라 불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문화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힘이 어떻게 사회구조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분석한다. 문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역사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연구는 역사와 경제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된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그의 시각이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구에서 출간된 많은 통사들이 그러하듯 실제로는 "서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1세계의 문학사는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2세계의 문학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몇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던 문화연구가 점차 학제 내부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 역시 점차로 학문의 한 분야로, 학문제도와 권력구조의 일부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문화연구가 마치 서구(미국과 유럽이 제공하는)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중문화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문제). 그렇기에 문화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식민지화 작업에 봉사할지도 모를 앵글로색슨의 하위계급에 대한 연구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지역연구여야 하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구들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새로운 틀을 갖추어야만 할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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