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겉발림으로 하는 다정한 말이 아니다.비극의 본질에 상응하는 깊이를 지닌 언어뿐이다.그것을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헨미 요
투쟁 따위는 없었다. 국회에서는 법안에 다소 비판적인 질의가 있었으나 별다른 일 없이 전원일치로 채택됐다. 국가총동원법은강압적으로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되는 대로 내맡기기와 몰주체성에 대해 죽기 전 한 번은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 P13
1937년의 중국에서 ‘황군‘ 병사인 너는 군도를 빼어들고 사람을 베어 죽이려는 충동을 멈춘 채 제정신을 차리고 그 충동을 광기로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멈출 수 있었을까 - P30
히토바시라(사람기둥), 히토바시라는 다리나 제방, 성 등을 쌓을 때 공사의 성공을 기원하며 신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희생물로 사람들을 물 밑바닥이나 땅속에 생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 P48
아버지는 가끔 중병에 걸린 개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옆으로 쓰러져 하수구를 떠내려가는 죽은 짐승같은 얼굴. 그런 눈은 전쟁의 시간을 살아가야 했던 인간으로서 어쩐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어 무서웠으나 반드시 싫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인가. 무엇을 보고 온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대해 결국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내게도, 그것을 불문에 붙임으로써 상처를 피하려는 교활한 의도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고, 끝내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끝내 직접 물어보지 않았던 나는 아마도 같은 죄를 지은 것이리라. 묻지 않은 것-말하지 않은 것. 많은 경우 거기에서 전후 정신의 괴이쩍은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 P181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말이 문득 튀어나왔다. "아, 모든 것이 적의 악, 전쟁의 악 때문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심호흡을 하면서 그 말을 더듬거렸다. 그 말의 밑바탕에 봐서는 안 될, 알아서는 안 될 광경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그 무렵에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 광경이었다. 나는 잔혹하게도 거기로 아버지를 몰아세워 보기도 했다. - P183
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 않고 꿈을 꾸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상당히 밝아진 얼굴로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꿈이었느냐고 질문했다.그가 뭐라고 받아 적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리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내가 한 말을 받아 적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는 입술 읽는 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귀머거리와 비슷할 것이다. - P355
아가씨, 한 번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해야 되겠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에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어머님께서 같이 가신다면 흠잡을 데 없는 자리가 되겠죠. - P361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 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 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 - P15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 P38
넓고 깊고 복잡하고 미묘하면서 언제나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을 주로 침묵의 세계 속에 품고 있었을 그런 그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작가와 작가의 인물에게 동시에 빠져들게 되는 글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쁨과 비로소 해소되는 갈증.
늙은 딸기코는 모험을 찾아다니는 기사야. 그 사람 같은 부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안타까워. 그 늙은이들은 세상사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거든. 나는 그들이 좋아. 그들은 늘 최악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지. - P48
그녀는 점점 루스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10년 전에 그녀는 앞으로 여린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그런 감정은 가치 있다기보단 오히려 골칫거리였고, 허영은 그녀의 약점이었다. 그녀는 존경받기 위해 몹시 노력했고, 주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결심을 접고 루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만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 P153
이제 그녀는 리딩 씨를 불필요하게 지켜낸 것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리딩 씨가 그렇게 내버려진 채로 죽었다면, 리딩 부인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프린시스 로드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가장 컸고, 만약 머물렀다면 블렌킨솝 씨는 그녀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 더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터였다. - P215
로버트 코더를 응시하며, 해나는 블렌킨솝 씨를 잊었다. 그의 진지한 자기기만(그녀는 그게 진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에 깜짝 놀랐고,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만들어낸 생각도 꼭 그만큼 호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자신을 위해 만든 세상(그 안에서 그녀는 현명하고, 위트 있고, 연민의 폭이 넓고,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은 그 세상을 지탱할 만큼 필사적인 힘이 없었다면 와르르 무너져 폐허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그녀의 놀란 마음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 세상이 서 있지 못하면, 그녀는 그것과 함께 무너질 것이다. - P228
하워드가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혹은 경고의 뜻으로 잔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슬그머니 숲으로 들어가버린 야생동물처럼사라진 것이 그날이었고, 뒤따른 흥분과 분노, 당혹감, 설명에 대한 요구, 슬픔과 눈물 속에서 엉클 짐은 그 동물을 달아나게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하며 침착하고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아버지가 짜놓은 그물에서 달아나려면 한순간에 갑자기 툭 끊어내야 한다고, 은혜를 모른다는 질책과 너무 많이 겪어온 부드러운 폭력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했다.짐은 자신의 감정이 질문의 대상이 되면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바다로 나간 것이고, 누이가 닭장 안의 닭처럼 느낀 거라고 중얼거렸다. - P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