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갑내기들 역시 모두 전쟁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승리의 아이들이었으니까. 승자의 아이들.그때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어느새 죽음은 나에게 삶의 중요한 비밀이 되었다.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 P18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P29
문장에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올바른 길이란 없다. 긴 문장도 짧은 문장도 표현 수단의 하나다. 클라이스트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언어가 주는 기쁨이 뇌세포와 다른 세포에 직접 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흔들리는 문체로 지진을 묘사하고, 역사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풍경에 문체로 동요를 일으키는 문장은 악문이 아니다. - P39
원래부터 있던 공동체엔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산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서 사람들이 언어의 힘을 빌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P48
기이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다니... 호기심에 하루키 기담집과 함께 구매했는데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남.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 P21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거고, 내가 원하지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204
하지만 나는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 P217
잎들은 많지만 뿌리는 하나.나는 젊음의 거짓 날들을 지나면서잎과 꽃들을 햇빛 속에 요란하게 흔들었다.이제야 나는 진실 속으로 움츠러들 수 있다.윌리엄 버틀러 에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