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끼의 식사는 물론 커피도 간식도 술자리도 야식도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육중한 하루가 통째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시간이 늪처럼 고여 흐르지를 않았다. - P-1
만약 우리가 자유라는 말로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힘만이 아니라 특히 그 누구도 굴복시키지 않는 힘까지 아울러 일컫는다면, 아마도 자유는 언어 바깥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언어에는 외부가 없습니다....우리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언어체로 속이는 방법, 언어체를 속이는 방법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언어의 영구 혁명이 발하는 광휘 속에서 권력 - 바깥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이 이로운 속임수, 말하자면 슬쩍 따돌리는 동작, 그 멋진 술책을 저는 제 방식대로 문학이라 부릅니다. - P-1
실재는 재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끊임없이 단어들을 통해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기에 문학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실재가 재현 불가능하며 다만 입증 가능할 뿐이라는 사실은 여러 방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실재와 언어 사이에 아무런 상응 관계가 없다는 그 사실을 인간들은 감수하려 하지 않으며, 아마도 언어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을 이 같은 거부가 끊이지 않는 분망 속에 문학을 생산합니다. - P-1
"언어를 바꾸기"라는 말라르메의 말과 "세계를 바꾸기"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병존합니다. 이는 말라르메를 따랐거나 따르는 이들 사이에 말라르메의 정치적 청취가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 P-1
존재하는 욕망들의 수만큼 많은 언어들을. 이는 여태까지 어떤 사회도 다수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안입니다. 한 언어가, 그것이 무엇이 됐든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주체가 아무런 자책감이나 억압 없이 언어의 두 심급을 마음대로 즐길 줄 알며 법이 아니라 배덕에 의해 이 언어 또는 저 언어를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P-1
결국 기호란 기대에 더 잘 어긋나기 위해서 생각되는 것, 마땅히 그러기 위해서 다시 생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P-1
21시 50분,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 출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트리에스테로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비상식적일 만큼 늦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 P-1
나는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시인 움베르토 사바(Umberto Saba, 1883~1957)가 평생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던 무거운 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바에 이끌려 여행을 떠나려고 밤이 이슥한 공항에 있는 내가 꼭 계절에 맞지 않은 까맣고 작은 곤충 같았다. - P-1
베네치아로 향하는 열차의 창을 통해 바다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트리에스테를 바라보며 나는 이탈리아에 속하면서도 계속 이국을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에, 밀라노에서 살던 무렵 너무나도 굳건한 문화에 견딜 수 없어지면 리나테 공항의 북새통으로 이국의 소리를 찾아가곤 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 P-1
어느 해 가을, 나는 용돈을 모아 시부야의 큰 꽃집에서 히아신스 알뿌리 두 개를 샀다. 뜰의 양지바른 곳을 골라 묻었더니 한겨울에 작은 싹이 나왔다. 이런 추위 속에서 하고 걱정되어 나는 학교에 가서도 공부에 집중이 안 됐다. 낮에도 밤에도 옆에 있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헛간에서 찾아낸 몇 장의 유리판으로 그것을 둘러싸고 밤에는 거적으로 덮어주었으며 매일 아침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히아신스의 싹은 서리에도 지지 않고, 고양이에게도 밟히지 않고 무사히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 P-1
몇 년 만에 다시 읽어본 글은 역시나 새롭다.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기도 하다가 알 수 없이 눈물이 솟았는데, 대체로 알지 못하는 마음의 어디에서인가 작고 단단한 매듭이 풀어져, 놓여나 홀가분해진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글이 가능한지...
내가 엄청난 실수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내가 시간을 그나마 잘 타고난 또 한 명의 ‘야만적인 정신과 의사‘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피해망상. 거기에 더해 오늘 걱정거리가 새로 하나 더 늘었다. 정신의학은 일상생활을 의학화하는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가? -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