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애초에 체념한 내 잘못이다. 체념하는 대신 미워하면서 헤어졌어야 했는데.
하지만 문제는 정현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그간 자신이 선택했던 것들이 자신을 배반한 역사가 너무 길고 깊었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웠다면 자신은 더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다. 특히 서일을. 그러니까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그 근거가 될 만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신뢰해서는 안 됐다.
다른 방식으로 뇌를 작동시키는 긁읽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더 좋은 독서일 가능성도 있는데, 읽는 중 뇌가 불안정해지는 게 글 자체의 의도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판단 안됨. 한번 더 읽어봐야 할 듯.
그게 아버지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그것을 꺾는 세계의 이야기가. 아버지는 나도, 그리고 세상 어떤 사람도 ‘여자인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스망스는 대화 중에 슈브뢰즈라는 지명이 나온 것을 기억했다. 그러고 나자 그해 가을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