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몰래 훔쳐본 수진 언니의 일기장에는 ‘잘못한 사람도 없고 당한 사람도 없고 세상은, 그냥 그렇게 모두가 똑같은 인간으로 살다 가는 것일 뿐일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 P78
홍한별님 안목과 번역을 신뢰하게 되어서 번역하시는 책은 구매하는 편이고, 이 책도 그런 신뢰로 읽게 되었다. 일부 동의하기 어렵거나 편향(나도 그렇지만)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약간은 거슬렸지만 글은 매우 좋다. 어차피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타인에게 내 언어를 온전히 전달하거나 도달하게 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지 않을까? 반대의 경우로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대체로 오해한 채로 살아가듯이... 과거의 번역본들이 번역자의 세계에 갇혀 알고 싶지 않은 좁다란 번역자의 세계를 감당하면서 훼손된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나는 의역 혐오주의자에 가까워 멋대로 의역하거나 배설된 글에 배상을 청구할 지경이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상당수의 고전을 다른 번역본으로 구매하게 될 것은 부수익!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나는 친구와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비록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만, 땀을 흘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과 가슴은 온통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는 축축했다. 그는 매너 있게 멈춰 서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붉은색 페인트를 덧바른 콘크리트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나무 벤치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하면서 말이다.
이야기의 끝은 항상 수도 없이 존재해왔으나 하나같이 이야기를 끝내기는커녕 그 어떤 이야기로도 엮이지 않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야기를 끝내려면 나에게는 어떤 의식의 행위가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