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르지. 가끔 밭일을 하다가 드는 생각이 있는데……."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깍지 낀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두 손이 식탁 위로 툭떨어졌다. "무슨 생각이냐면......." 그는 자신의 손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는 가을에 대학에 들어가거라. 여긴 네 어머니랑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버지가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해 가을에 스토너는 컬럼비아로 가서 농과대학 1학년생으로 등록했다. - P12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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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소파 등받이에 오른팔을 걸치고 앉은 채 왼편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한 여인의 사진. 그녀는 앞머리가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금테 안경을 낀, 수줍어 보이지만 작은 눈만은 장난꾸러기처럼 반짝이는 동아시아계 여인이다. 사십대 중반의 나의 이모. - P18

그건 선자 이모가 당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기 초반에 명시되어 있듯, 선자 이모의 오빠들이 "수없이 여러 번에 걸쳐서 선자 이모에게 "독일에 가더라도 결코 빨갱이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194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이제 겨우 우리도 살 만해졌는데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고. 한미 아빠는 광부 기숙사 우편함에 시시때때로 배달 오던 북한 선전물들을 감히 펼쳐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아다 한국 대사관에 가져다주었다는 사람이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던 같은 광산 출신 광부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두려움을 감추려 몸집을 부풀리는 짐승처럼 매국노라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 한미 아빠는 6.25 때 아버지를 잃었어. 한미 아빠가 평생 얼마나 고생하며 성실히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그 마음도 이해가 갔단다. 그런데도 나는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 P201

전형성을 탈피한 간호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하고 있노라면 얼마 후 내가 상상해낸 인물보다 훨씬 더 진취적이고 급진적으로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사례를 맞닥뜨리는 일이 잦았다. 그러므로 [눈부신 안부]를 쓰기까지 내게 영감을 준 여러 간호 여성들의 주체적인 삶에 내가 많은 부분 빚졌음을 적어둔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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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왔고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던 그녀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둠이 소리도 없이 벚나무를 거두어들인다. 마지막 남은 나뭇잎을 거두어들이자 나뭇잎들은 저항없이 속삭이며 어둠을 받아들인다. 피곤하다, 하루가 거의 끝났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일이 아직 많고 아이들은 거실에앉아 있지만 그녀는 유리창 앞에서 잠시 쉰다. 어두워지는 정원을 보고 있자니 이 어둠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 밖으로 나가 어둠과 함께 누워서, 낙엽과 함께 누워서 밤을 보내고, 새벽과 함께 잠에서 깨 아침이 오면 새로워진 모습으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가 생각 속으로 들어오고, 그 날카롭고 끈질긴 소리 하나하나에 두드리는 사람의 존재가 가득해서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다.


이제 어두워지는 정원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 어둠의 일부가 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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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겉발림으로 하는 다정한 말이 아니다.
비극의 본질에 상응하는 
깊이를 지닌 언어뿐이다.
그것을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 헨미 요

투쟁 따위는 없었다. 
국회에서는 법안에 다소 비판적인 
질의가 있었으나 별다른 일 없이 
전원일치로 채택됐다. 
국가총동원법은
강압적으로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되는 대로 내맡기기와 몰주체성에 대해 
죽기 전 한 번은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 P13

1937년의 중국에서 
‘황군‘ 병사인 너는
군도를 빼어들고 사람을 베어 죽이려는 
충동을 멈춘 채 제정신을 차리고 
그 충동을 광기로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멈출 수 있었을까 - P30

히토바시라(사람기둥), 
히토바시라는 다리나 제방, 성 등을 쌓을 때 
공사의 성공을 기원하며 
신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희생물로 사람들을 물 밑바닥이나 
땅속에 생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 P48

아버지는 가끔 중병에 걸린 개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옆으로 쓰러져 하수구를 떠내려가는 죽은 짐승같은 얼굴. 그런 눈은 전쟁의 시간을 살아가야 했던 인간으로서 어쩐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어 무서웠으나 반드시 싫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인가. 무엇을 보고 온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대해 결국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내게도, 그것을 불문에 붙임으로써 상처를 피하려는 교활한 의도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고, 끝내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끝내 직접 물어보지 않았던 나는 아마도 같은 죄를 지은 것이리라. 묻지 않은 것-말하지 않은 것. 많은 경우 거기에서 전후 정신의 괴이쩍은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 P181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말이 문득 튀어나왔다. "아, 모든 것이 적의 악, 전쟁의 악 때문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심호흡을 하면서 그 말을 더듬거렸다. 그 말의 밑바탕에 봐서는 안 될, 알아서는 안 될 광경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그 무렵에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 광경이었다. 나는 잔혹하게도 거기로 아버지를 몰아세워 보기도 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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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 않고 꿈을 꾸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상당히 밝아진 얼굴로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꿈이었느냐고 질문했다.

그가 뭐라고 받아 적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리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내가 한 말을 받아 적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는 입술 읽는 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귀머거리와 비슷할 것이다. - P355

아가씨, 한 번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해야 되겠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에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어머님께서 같이 가신다면 흠잡을 데 없는 자리가 되겠죠.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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