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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프레드릭 배크만은 요나스 요나손에 이어 내가 알게 된 두번째 스웨덴 작가다. 책표지가 <창문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글에서도 유사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말은 곧, 이 책이 시간 가는 걸 모르고 푹 빠져 읽을 만큼 재밌고, 메인 캐릭터가 매우 강렬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한 문체의 소설이었다는 뜻이다. 블로그에서 처음 연재되었던 소설이라는데, 강렬한 부제를 단 40개의 챕터, 에피소드가 모여 하나의 소설로 묶이는 형식, 간결한(문장도 짧고, 수식어도 많지 않은) 문장이 가독성을 높여서 400페이지 넘는 책이 결코 두껍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든다.
여기, 오베라는 남자가 있다. 자명종 없이도 매일 아침 6시 15분 전에 눈을 떠 커피 여과기를 사용해 늘 정확히 똑같은 양의 커피를 내리고, 동네를 돌면서 발길질을 하면서 교통표지판 같은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한 뒤, 방문객 주차 구역으로 가서 모든 차 번호를 수첩에 적으며 약속된 24시간 이상 주차한 차가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하는 남자. 갑작스레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철도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버지가 가르쳐준 신념(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을 지키기 위해 누명을 쓰고 야간 청소부가 되어야 했고,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은 차(BMW)를 샀다고 하나뿐인 친구와 의절해버린 흑백논리의 사나이.
그렇기 때문에 이 남자, 오베는 그의 삶에 유일한 색깔이었던 아내 소냐가 떠난 이후 더이상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자살을 결심한다. 처음에는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했고, 소냐의 신경제 약을 한움큼 삼기려고도 했었고, 소냐의 아버지가 물려준 총으로 머리를 쏘려고도 했으며, 기찻길 위로 떨어진 남자를 구해낸 김에 기차에 치여 죽으려고도 해 봤지만, 이 까칠하기만 한 남자는 그를 필요로 하는 동네사람들에 대한 오지랖 때문에 소냐가 생전에 사랑하던 고양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공포에 질린 '애송이' 기관차의 삶이 파멸될까 봐 거듭해서 자살을 실패하게 된다.
앞집에서 온 외국인 임산부와 그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꼬리가 절반이 잘리고 귀가 하나뿐인 고양이와 몸무게가 심하게 많이 나가는 이웃집 젊은이 지미, 아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 하나였던 아드리안, 동성애자 미르사드, 그리고 아내와 오베의 오랜 이웃이었던 치매 걸린 노인 루네와 그의 부인 아니타가 오베의 한결 같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슨 말만 하면 화를 내고, 거절하고, 규칙을 따지기만 하는 이 괴팍한 남자가 남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기술들(가구를 수리하고, 집을 짓고, 차를 고치는 법)을 알고 있고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질 못하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계속해서 찾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내가 가르쳤던 지침들을 잊지 못했던 오베는, 그 가르침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그의 이웃들로부터 배우게 된 것이다.
오베가 아내 소냐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으며, 오베가 소냐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그러니까 오베와 소냐의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던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오베의 끝도. 아, 그러고보니 이 소설, 스웨덴 소설판 <국제시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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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퇴를 바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들이 잉여가 될 날을 고대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 있지? 하릴없이 배회하면서 사회의 짐이나 되는,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걸 소망하지? 집에 앉아 죽을 때나 기다리는 삶. 더 최악인 것은 누군가 자길 양로원에 집어넣어주길 기다리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화장실에 가는 삶. 오베는 그보다 더 나쁜 게 뭔지 상상이 안 갔다. (p.41)
오베가 좁은 샛길을 통해 쇼핑센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차공간이 두 곳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평일 낮에 전부 쇼핑센터에 있다는 게 오베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진정 사람들이 일할 곳이 더 이상 없는 것이었다. (p.48)
오베는 아버지의 동료들이 톰에 대해 좋게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부정직하고 심술궂었다. 그게 아버지의 동료들이 파티에서 맥주 두어 병을 마시고 나서 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오베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없었다. 동료들의 얼굴을 한 번씩 보며 "애가 넷에다 마누라는 아파"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톰보다 사정이 나은 사람들도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그러면 동료들은 대게 화제를 바꿨다. (pp.65-66)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만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p.69)
오베가 뚱뚱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 수 있다. 그는 그저 뚱뚱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는지 헤아릴 수 없을 뿐이었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2인분의 인간이 된 것일까? 아마 그렇게 된 데에도 모종의 결단이 필요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p.71)
누군가를 잃게 되면 정말 별난 것들이 그리워진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미소, 잘 때 돌아눕는 방식, 심지어는 방을 새로 칠하는 것까지도. (p.83)
열여섯에 고아가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가족을 대 체할 자기 가정을 꾸릴 시간을 가져보기도 훨씬 전에 가족을 잃는다는 것. 그건 무척 독특한 종류의 고독이었다. (p.103)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p.114)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너무 자주 바꾸는 나머지 물건이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는 전문 기술이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됐다. 누구도 품질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루네도, 다른 이웃도, 오베가 일했던 직장의 관리자들도. 이제는 모든 것이 전산화되어야 했다. 꽉 끼는 셔츠를 입은 컨설턴트들이 노트북의 뚜껑 여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 아무도 집 한 채 지은 적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게 그 옛날 콜로세움과 기자의 피라미드를 세운 방법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p.118)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아무도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 하나 설치 못했다. 바닥에 타일도 못 깔았다. 벽에 회반죽도 못 발랐다. 자기 세금 장부 하나 못 챙겼다.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잃어버린 형태의 지식들만 넘쳐났다. 한때 이런 이야기들을 루네와 했다. 그랬는데 루네는 가서 BMW를 샀다. (p.119)
소냐의 어머니는 소냐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다. "난 여자가 있어. 지금 집에 없다 뿐이지." 가끔 누군가 감히 그 질문을 던지면 그는 그렇게 툭 내뱉었다. (p.209)
그는 자기와 루네가 평화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녀가 실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루네 사이의 적개심이 소냐와 아니타가 최고의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망쳤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하지만 갈등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다 보면 수습을 하는 게 불가능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갈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구도 기억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오베는 그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몰랐다. 어떻게 끝났는지만 알았다. (pp.324-325)
"다른 집 아내들은 자기가 머리를 새로 한 걸 남편들이 못 알아본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잖아요. 제가 머리를 하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달라졌다고 며칠 동안 짜증을 내더라고요." (p.353)
예전에 소냐는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시대를 잘못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인생에서 몇 가지 단순한 것들을 바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머리 위 지붕, 조용한 동네, 똑바로 만든 자동차, 헌신할 수 있는 여성, 제대로 된 할 일이 있는 직장, 정기적으로 뭔가 망가져서 언제나 고칠 게 있는 집. (p.370)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p.410)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pp.4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