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없는 예수 - 아직도 성경 속 ‘스토리’에 의존하는가?
우덕현 지음 / 상상나무(선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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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성경 스토리에 당대 시대상의 주석을 입힌 <Killing Jesus>를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은<Killing Jesus>의 내용과 정반대의 메세지를 던진다: 성경의 자구적 해석을 벗어나라! 

 

이 책은 크게 (프롤로그&메인 메세지)-(성경에서 얻는 지혜)-(작가와의 인터뷰)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세지가 흥미로워 파트1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파트2: 성경에서 얻는 지혜>부터는 이 역시도 저자의 해석이 과하게 들어간 것은 아닌지 싶었다. 파트2에서 소개하는 성경문구를 반으로 줄이더라도 성경 원문과 같이 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성경의 자구적 해석에서 벗어나라는 메세지를 던지던 저자가 자신의 성경 해석문구만 달랑 책 속에 싣다니, 아이러니하잖는가.

 

사실 성경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두껍고, 어렵고, 난해한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어서 접근이 어렵다. 또 반대로 성경을 깊이 공부하던 이들 중 일부는 성경의 수많은 에러들(4대복음서에서 예수의 에피소드들이 시간이나 순서 등이 맞지 않는 경우 등)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거나 신앙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성경을 문맥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성경에 많은 은유가 들어있는 이유는 "예수 당신께서 권력 압제라는 시대의 한계 속에 민중의 지적 수준을 고려해 말씀을 그리 담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쉽고 직접적으로 던져지는 메세지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는 달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져버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기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 그가 그 위에 씌워둔 가림막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말한다. 종교는 성경에서 은유를 벗겨내지 않은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교리화했고, 신자들에게 예수의 말과 행적을 의심없이 믿으라고만 말해왔다. 그렇지만 의심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고대의 성경은 현대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종교가 적대시해야 할 대상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내부의 적들, 무지, 맹신, 흑백오류, 그리고 다름에 대한 혐오감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아무리 흠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사랑의 종교를 세우고 퍼트렸다고 할지라도, 그의 가르침을 전한 제자들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였고, 효율적인 종교 관리를 위해 약간의 각색과 협의를 볼 줄 아는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전부 예수처럼 이교도인도 사랑으로 품을 줄 아는 '신'이 아니라 자기 민족 또는 자기 가문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무리 종교의 시작이 흠 없었더라도 끊임없이 방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나는 성경을 다시 읽는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만 이 책은 담고 있는 메세지 대비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붙인 포스트잇은 전부 프롤로그와 파트 1에만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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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말씀의 대부분은 은유에 담겨 있다. (…) 예수 말씀이 은유에 담긴 것은 예수 당신께서 권력 압제라는 시대의 한계 속에 민중의 지적 수준을 고려해 말씀을 그리 담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자구적 해석이 교리화 되었고, 오류 없음과 같은 등급으로 포장되면서 누구도 두드려서는 안 되는 천국의 문이 된 것이다. 진실이 아닌 것을 머릿속에 받아들이면 세뇌되어 살게 된다. '은유를 벗겨내지 않은 말'은 받아들인 사람을 센서화 시킨다. (p.5)

 

비그리스도 청소년이든 크리스천 청소년이든,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객관적으로 다가갈 방법은 사실 전혀 없다. 성경이 인류 최고의 고전임은 알더라도 예화 몇십 개, 영화로도 종종 만들어지는 스토리와 자구적 명구만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성경은 '영성'을 담은 것인데, 영성을 배제한 성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카톨릭이든 개신교 어느 교파이든 그들의 교리 기준으로 펴낸 책은 그들 교회의 신자들이 읽어내기엔 적합하겠지만, 그 외 사람들의 입장에선 호교론과 다르지 않다. 인류의 68%가 비그리스도인인데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전혀 없는 셈이다. 더구나 은유를 벗겨내지 못하고 자구적 해석에 머물러 있기에 크리스천조차 예수가 아닌 제자들의 말에서 조언을 찾는 실정이다. 성경이 세계 최고의 고전이지만, 인문 서가에 꽂히지 못하는 이유는 이와 다르지 않다. (p.9)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선교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아마존 가장 깊은 정글에 사는 원주민에게 어떤 종파나 교파의 성경이 전해진들 그들이 예수의 가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얻은 신이 더 행복을 줄까? 그들 삶의 질이 얼마나 더 향상될 수 있을까?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 정답을 예측할 수 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말과 행동을 따르며 비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살고 있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나라가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공상과학 영화처럼 사후 천국만을 기다리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p.21)

 

식물이 햇빛으로 머리를 두듯, 인류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축복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진리의 방향이 필요하다. 잡풀도 겨울을 이기고 나와 갓 얼굴을 드러냈을 땐 난 못지않지만 한두 뼘만 자라 오르면 그 기운이 사라지듯, 아무리 종교의 시작이 흠 없었더라도 끊임없이 방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p.24)

 

서기 312년에 이르러 기독교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꿈속에서 하늘의 십자가를 보았고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뒤 군인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했고 전쟁에서 승리해 로마를 통일시킬 수 있었다. 로마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기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거쳐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킨다. 몰수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게 하고, 종교로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부흥기를 맞는다. (p.31)

 

312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피조된 중보자로서 하느님과 유사 본질을 갖는 존재'로 주장한다. '예수가 창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지만, 신은 아니다.'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논쟁을 불러왔고,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입했다. 황제는 325년에 주교들을 소집해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예수의 신인양성 주장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그와 대립하던 주장을 이단으로 선포한다. (p.33)

 

서기 376년,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회의를 열어 아타나시우스가 추천한 27권의 목록에 합의했고, 신약성경으로 확정한다. (p.34)

 

기록물을 번역하거나 필경사가 다시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내용을 온전히 옮기기에는 인간이라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당시의 성경은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 등도 없이 붙여 썼고,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다. (독서의 편의를 위해 장은 1226년, 절은 1551년에 확립되었다.) 잘못 읽거나 잘못 받아 적은 것들이 생겨났고, 필경사가 속한 공동체의 신앙을 대변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떤 문장을 삭제하거나 글자를 빼 아예 본문을 수정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p.36)

 

4세기경, 로마 카톨릭 교황 다마소 1세는 제롬을 비서로 임명한다. 제롬은 성경 주석과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옮기는 일에 능숙한 신학자였다. 교황은 제롬에게 수많은 라틴어 필사본을 참고해 라틴어 사용권 지역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성경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제롬은 그때까지 라틴어로 번역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사본들과 라틴어 사용권 밖(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을 대표하는 그리스어 사본의 본문을 하나하나 비교했다. 그 결과물은 서기 405년에 탄생한다. 이 성경(Vulgata bible)이 1546년에 카톨릭의 공식 성경으로 채택된다. (p.37)

 

이러한 신약성경을 그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더라도 예수가 아람어로 한 말을 '코이네'로 번역한 기록물과 마주하게 된다. 설령 '사본학'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성경을 찾아내고, 단어나 문장을 열심히 파고들지라도 학술적 종착점은 복음서 저자의 작가 세계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서로 다르니 곧, 서로 다른 성경 저자들의 '들은 말', '재인용한 말'과 만나는 셈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 저자와 만나는 게 아닌 예수의 가슴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p.40)

 

신약의 복음서는 구약과 닿아 있다. 예수도 구약과 연결을 이루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야훼 하느님과 예수의 말씀을 분리할 수 없음이 그것이다. 구약성경 또한 하느님이 불러주고 누가 받아쓴 게 아니다. <창세기>를 예로 들면, 창세기를 집필한 '성서 기자'들의 세계관 가운데 신의 권능과 그에 대한 인간의 경의를 압축해 표현한 그 당시의 시적 서술과 다르지 않다. 창세기의 저자가 그때까지 그 공동체에서 품고 있었던, 신과 우주에 관한 모든 지식을 통합한 것으로 보면 된다. (p.44)

 

구약의 자구적 해석 전승은 우리 시대까지 강요되고 있다. 기록 가운데 그대로 받아들여 가치로 삼을 수 있는 내용도 많지만, 반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들도 부지기수이다. 구약 강독시 자구적 해석에 빠져들면 안 될 곳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하루를 24시간 단위로 생각하거나 그 하루하루가 과학적 창조 순서일 것이라고 해석해 받아들이면 정신적인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주엔 태양계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우주와의 관계성 없이 독자적으로 태양계만 생성될 수 없으니 창조의 시간이 지구 기준일 리가 없다. 지구의 하루와 우주의 하루가 다르기에,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루를 지구의 하루로 대입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물론, 창세기가 과학서가 아니기에 우주 어느 시점의 하루로 정하더라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p.45)

 

이런 이야기들을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처럼 받아들이게끔 스토리로만 주입하게 시킨다든지, 더 쉽게 전하겠다고 자구적 해석으로 애니메이션처럼 술술 풀어낸다면 성경을 읽는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릇된 정보를 베이스로 삼으면 세상 사물과의 관계나 이치 판단을 뇌가 정확히 해낼 수 없으니 문제가 발생한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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