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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역사 야사를 모아놓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책 제목만 보고 야사 책을 많이 구입했다.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시리즈, 재미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등. 그러나 이 많은 책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들만큼 잘 써진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책 제목을 읽고 기대했던 것보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또는 저자의 상상력과 문장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소설 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자극적인 제목과 단어가 남발되는 책들은 소장욕구를 느끼지 못해 알라딘 중고로 처분했다. 그렇다고 야사 책을 읽는 것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다. 다만, 이제는 책 제목보다는 책을 쓴 사람이 누구냐를 우선으로 고려하는 편이다.
이 책 역시 아쉬움이 다소 있지만 앞에 읽었던 야사 책들과 비교하면 잘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읽을 만한 쉽게 읽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을 크게 나만의 사랑과 서로의 사랑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소제목을 달아 사랑을 분류했다. 그리고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개 엮어 들려주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달고 있다. 저자가 들려준 많은 사랑 이야기 중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몇가지 꼽자면, 윤지경과 최소저의 사랑, 조신의 꿈, 포의교집 순이다. 이 중에서 이상적인 사랑은 윤지경과 최소저 뿐이고, 나머지는 하자 있는 사랑 이야기다.
윤지경 이야기는 중종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데,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교묘하게 섞여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처럼 느껴진다. 윤지경이 최 참판의 딸과 결혼식을 올리는 날, 경빈 박씨의 딸 연성옹주랑 결혼하라는 왕명이 떨어지며 문제가 발생한다. 윤지경은 자신이 옹주와 결혼하면 최씨 여인이 청춘과부가 될 것을 염려하며 왕명을 거절하는데, 왕의 진노를 두려워한 최 참판과 윤지경의 아버지 윤현이 둘을 파혼시켜 윤지경은 억지로 왕의 부마가 된다. 결혼 후에도 윤지경이 옹주를 거들떠 보지 않자 최 참판과 윤현이 공모해 최소저를 숨긴 뒤 거짓 장례를 치르는 소동까지 벌인다. 나중에 경빈이 작서의 변으로 처형되어 몰락하자, 윤지경과 최소저는 귀향에서 풀려나 더 이상 억압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된다. 이 이야기 중간에 왕이 윤지경에게 최소저를 만나지 말라고 억압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는 장면이 있는데, 왕의 사자 앞에서도 윤시경은 최소저 따라 명주실 꾸러미로 실을 잣느라 정신이 없다. 조선 시대 이런 애처가가 있었다니, 이 이야기를 사자에게 전해들은 왕도,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도 윤지경이 집안일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피식하고 웃었다. 조선 시대 모든 남자들이 윤지경과 같이 아내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신은 승려로, 우연히 보게 된 신분 높은 김씨 아가씨를 사모하게 되어 밤마다 관음보살에게 그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빈다. 그러다 수년이 흘러 아가씨의 혼례 소식을 듣고, 조신은 슬픔에 잠겨 통곡하다 실신해 꿈을 꾸게 되는데, 사랑하는 김씨 아가씨가 결혼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다. 조신은 사랑하는 아가씨를 얻지만 가난과 병으로 인해 수십년간 어렵게 산다. 갑작스런 큰 아들의 죽음을 겪고 크게 상심한 부인은 조신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데, 조신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쁘고 행복한 기분이 들어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조식은 김씨 아가씨를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고 평생 동안 선한 일을 하며 살다 죽는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드는 가장 먼저 생각은, 아무리 주변에서 말리고 조언을 해줘도 듣는 당사자가 귀를 닫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는 그래, 겪어봐라, 그리고 깨달아라, 하고 냅두는 것이 상책이다. 관음보살은 조신에게 김씨아가씨와 우리 결혼했어요를 찍어볼 기회를 줌으로서, 철없이 굴던 조신이 현실을 직시하게끔 했다. 연애와 달리 결혼은 현실이다. 사랑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생계를 끊임없이 걱정해야 하고, 생활이 궁핍해지면 마음이 각박해지고, 마음이 각박해지면 사랑은 사라지고 어느새 싸움과 미움, 화만 남는다.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좋은 이야기만 듣길 원하고, 좋은 생각만 하려 하는데, 실패 없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생각하고, 이를 대비할 방법을 찾고, 굳은 다짐을 갖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관음보살은 조신도 구했고, 김씨 아가씨도 구했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 고통받았을 다섯 아이들도 구했다. (물론 김씨 아가씨는 애시당초 조신을 몰랐으니 둘이 결혼할 일과 그 사이에서 애들이 태어날 일은 애시당초 없었다고 볼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포의교집은 마흔이 넘은 이생이란 변변찮은 양반이 열일곱살 어린 유부녀 초옥과 불륜을 저지르는 내용이다. 예쁘고 어린 초옥을 유혹하는 손길은 참 많았는데, 항상 쌀쌀맞고 냉담하게 굴던 초옥이 이생이 위아래 모르고 함부로 다니는 천한 행랑것들을 가르치고, 한밤에 자신을 만나서도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 반해 그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로 한다. 결국, 초옥은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오고, 친구들이 집을 마련해 초옥을 데리고 살라고 조언하지만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이생은 이를 거절,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비친다. 친구가 이대로 이생이 떠나면 초옥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이생은 이에 이렇게 답한다. "행랑에 있는 물건이니 뭐가 어렵겠나." 초옥은 포의지교를 나눌 상대로 이생을 보았지만, 이생은 그럴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사람을 잘 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몸은 허락했고 소문이 다 난 상태이니 이제와서 이생과 자신의 관계가 포의지교가 아니라고 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왠지, 오늘 날 네이트판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쉽게, "뭐 저런 사람을 만나. 당연히 헤어져야지."라고 말하지만, 막상 내가 그 일을 겪으면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헤어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남자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지하기 싫어서, 미련이 남아서, 남보기 부끄러워서, 손해를 어떻게든 줄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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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해서 보기에 예쁘고 듣기에 고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흉한 것은 흉한 대로 담겨져 있다. 그래서 고전이다.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배울 것이 없다. 좋은 것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에서도 배우는 것이 인생이다. (p.8)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날에 기뻤던 일들이 모두 이런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과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요?" 잊을 수 없는 말이다.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근심과 괴로움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이 말이 조신의 가슴속 깊이 박혀 있던 짝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건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근심과 걱정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지적한 말이다. (p.27)
당신이 부족하고 못나서 상대가 당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사가 그렇다. 당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태양의 신 아폴론보다 잘났겠는가. 그런 아폴론도 외면당했다. 다프네가 아폴론을 싫어한 것은 아폴론이 못나서가 아니었다. 그냥 싫었던 것이다. (p.49)
뭔가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다른 것을 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것이 더 아름답고 더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착은 사랑이 될 수 없다. (p.118)
사랑은 사소한 일상 속에 있다. 사소함이 진정이다. 사실 그것이 전부다. (p.305)
그녀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은 사랑을 만들어냈고 사랑을 이룩해냈다. 사랑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려고 찾아온 것은 분명 맞다. 그들은 알았다. 사랑이란 진행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진행의 방식은 먼저 깨달은 자의 헌신과 섬김이라는 것을 말이다. (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