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2 - 문종에서 연산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2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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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1권 태조에서 세종까지보다 2권 문종에서 연산군까지를 더 재밌게 읽어서 2권에 좀 더 높은 평점을 매겼다. 2권은 세자빈 권씨가 단종 낳고 죽던 날(방송20회), 계유정난(방송5회), 수양대군이 옥새를 받던 날(방송6회), 세조와 공신들이 피로 맹세한 날(방송21회), 남이 장군이 혜성과 함께 사라진 날(방송22회), 인수대비가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린 날(방송23회), 연산군이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날(방송24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별 기획은 조선 왕릉의 비밀이다.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설까. 세종에게는 유달리 총명한 아들들이 많다. 장남 문종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수양대군, 광평대군, 영응대군……. 믄종에 대한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세종에 대한 책을 읽으면 문종을 알게 되는데, 문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세종이 만들고자 했던 문치주의국가 조선의 틀이 굳어지고, 국방은 튼튼해져서 조선왕조가 좀 더 오래 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몸은 비록 약했지만 문종은 신기전을 발명, 제작할 만큼 군사에 조예가 깊은 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2권에 내가 생각하는 역사가 바뀐 날로 문종이 죽던 날을 추가 하고 싶다. (책에서는 문종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제목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워서다.)

 

그렇지만 문종의 아들, 단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아버지 못지 않게 총명했다는 글은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단종에 대해 알지 못하니 단종이 펼칠 치세는 상상이 아예 되지 않아, 세조가 반역에 실패했더라면, 단종이 왕위를 그대로 이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최근에 다음 웹툰 살생부를 읽고,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공신'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세조 이후로 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고, 공신들에 주어진 혜택이 어마어마했으며, 심지어 공신은 살인을 해도 이를 눈감아주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최근 방영된 그날의 '어사 박문수와 영조 균역법을 시행하다'에서 영조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르더라.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에는 모두가 나의 적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동복형제와 조카조차 죽여서 권력을 탐했던 세조에게도 백성이 이런 절절한 의미 있는 존재였을까? 세종과 문종이 품었을 애민사상이 사라져버린 세조의 조선은 매우 각박해진 모습이었을 것 같다. 세자빈 권씨가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계유정난이 실패했더라면 정말, 이렇게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산군. 사실 이전까지는 인수대비가 폐비윤씨가 반성하기는 커녕,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노라 거짓고변을 시켜 며느리를 죽인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연산군이 어머니 기일에도 난교를 벌이고, 어머니는 어머니고 나는 천수를 다 누리겠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품었던 일말의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가정교육이 문제였지만, 그것을 핑계로 대기에는 연산군이 저지른 일들이 너무 어마어마하다. 그가 만들어낸 고문 및 살인형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다. 만약, 성종이 태종처럼 연산군이 왕이 될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왕자를 왕위로 세웠더라면 어땠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 찾은 오타가 하나 있다.

<221페이지 신병주: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있는 것이 왕 무덤입니다.> 왕 무덤입니다로 고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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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문종이 연이어 결혼에 실패하니까 왕실에서도 '이제 검증된 사람이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성격도 좋고, 신발도 안 태우고, 술도 덜 마시는 그런 사람을 뽑은 게 바로 세자빈 권씨였죠. 이때도 빠뜨린 게 있었어요. 건강진단서 제출을 요구했어야 해요. 권씨가 워낙 몸이 약한 사람이라 단종 낳고 바로 사망하거든요. (p.28)

 

이해영: 문종은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느낌이에요. 우리에게 알려진 모습보다 문종이라는 사람 안에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구나, 끝내 하지 못한 말씀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38)

 

이해영: 단언컨대 피는 씻기지 않는다. 에너지가 보존되듯이 폭력도 보존되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번 발생한 폭력은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어딘가에서 분명히 또 다른 폭력으로 발생합니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일으킨 그 폭력이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좋지 안은 본보기입니다. 만약 세조가 저승에서 그때의 폭력을 후회한다면 김종서 개인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기나긴 폭력의 에너지를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72)

 

류근: 세조는 인간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인물이 됐지만, 신숙주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그 시대에 신숙주 같은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신숙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뢰한의 정치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게아니냐? 세조 시대가 이만큼이라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런 지식인들의 덕분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죠. (p.95)

 

박현모: 저는 세종을 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임금들을 연구할 때도 종종 세종과 빕교하게 됩니다. 세종과 세조 대에 공통적으로 여진족 토벌 기록이 나오는데요. 세조가 세종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종은 1438년에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7800여 명을 끌고 60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뒀고, 세조는 1467년에 만여 명을 이끌고 286명의 전과를 거뒀습니다. 거의 다섯 배에 가까운 수치죠. 게다가 세조는 대부분 최고 사령관인 신숙주에게 직접 지시를 내려 일을 추진하는데 비해 세종은 전부 기록을 통해서 의사를 결정했습니다. (p.98)

 

그날: 수양대군이 옥새를 받은 그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떨까요?

이해영: 어떤 경우에도 결과가 과정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다. (p.101)

 

그날: 노년에 한명회가 이런 시를 남긴다고요.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신병주: 한명회가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는 건데, 김시습이 이걸 보고 재치있게 패러디를 해요.

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p.115)

 

그날: 갑자사화를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한 복수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정치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봐야 할까요?

신병주: 어머니의 복수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실제로 갑자사화 이후에는 어머니 기일에도 유흥을 즐기고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교합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p.213)

 

신병주: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있는 것이 왕이 무덤입니다. 뒤에서 보면 오른쪽이 되죠. 보통 살아생전에는 좌상우하라고 해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다는 거죠. 그래서 삼정승 중에서 영의정 다음이 좌의정이거든요. 그 다음이 우의정이고요. 그런데 돌아가시면 이게 바뀌어요. 돌아가신 분을 기준으로 우상좌하가 되죠. 그래서 무덤 뒤편에서 볼 때 오른족이 높은 분, 즉 왕의 무덤이 됩니다. (pp.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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