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터 에드워드의 일기 1990~1990
미리엄 엘리아.에즈라 엘리아 지음, 박준영 옮김 / 그린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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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다운 삶이란?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취직을 하면 가족의 원조로부터 독립하여 산다. 집과 가구도 장만해 결혼한다. 검약하며, 아이들을 기르고, 예측 못한 지출을 대비해 저축도 한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평온무사하게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사람들도 이 모습을 보고 마치 훌륭한 일을 완수한 사람처럼 평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단지 개미와 마찬가지의 일을 했을 뿐...확실히 그는 나름대로 땀흘려 일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만으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진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유키치는 진정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묻고 있습니다. 동물로서 갖는 본능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을 겁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도시를 짓고, 문명을 이루고, 사회 속에 자리를 잡고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모르지요.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 행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종교지도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맡겨진 중책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만약 완전히 무의미한 일로 판명된다면 어떨까요? 우리 삶의 여러 패턴과 종교, 예술 등 어디서도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요? 철저한 뉴턴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생이란 철저한 필연에 따라 처음-중간-끝이 모두 정해진 기계장치 운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무게를 두고 살피는 모두가 작위적인 연결짓기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2. 에드워드의 용두사미

 

저자 남매는 어릴 적 기르다 떠나보낸 한 마리 햄스터로부터 영감을 받아,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의 햄스터를 한 마리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남긴 수 개월 남짓의 일기(!)를 저자가 발견하여, 고민 끝에 햄스터의 복리증진 및 인간과의 공영을 위해 그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설정의 서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토록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건 것치고는, 본문(에드워드의 일기)의 내용이 몹시 성기고 공허하여 당황스럽습니다. 강한 자아와 기성질서에 대한 반발심, 자신을 둘러싼 세계(햄스터 양육용 케이지)에 대한 의문과 성찰을 거듭하며 무언가 해내 보이리라다짐하는 에드워드이지만 그 끝은 늘 지리멸렬하지요. 단식투쟁은 채 15분을 넘기지 못하고, 쳇바퀴에 깔려 죽은 다른 햄스터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가 하면, 빤히 열린 케이지의 문을 보고도 알 수 없는 소심함과 두려움에 짓눌려 떨며 다시 자신을 가두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에드워드의 삶은 그의 조막만한 체구, 안쓰러운 지능만큼이나 쓸쓸하고 초라한 무의미로 여기저기 잠식되고, 그쯤에서 작품은 별다른 안내도 없이 불친절하게 끝나 버립니다.

 

3.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을까?

 

첫째로, 기존의 삶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햄스터가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공간의 규모에 비해 인간의 세계는 훨씬 넓고 깊지만, 결국은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저로서는 아직 에드워드의 삶과 제 삶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에게 만연해 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탈피를 꾀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삼겹살이나 치킨을 먹을 때마다 , 이거 저승에 갔는데 만약 염라대왕이 돼지나 닭이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할까생각해보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능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가치판단의 능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영혼의 불멸성이나 범우주적인 절대적 지위의 확보를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인간더러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건 오로지 인간 뿐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4. 덧붙임

 

(1) 이 책을 정독하는 데는 에드워드의 금식기간보다 겨우 8분 더 긴, 정확히 23분이 걸렸습니다. 철학 전문 출판사 그린비에서, '선물하기 좋은 철학책'을 모토로 만드셨다고 해요. 의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하나, 아무래도 텍스트의 밀도가 다소간 빈약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인간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햄스터의 사유와 행동의 폭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렇게 구성된 것이라면, 감히 평하건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획입니다.

 

(2)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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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은 유령이 아니야 찰리의 작은 책꽂이
원유순 지음, 홍기한 그림 / 찰리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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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 유수의 아동문학상을 수상해온 동화작가 원유순 님의 신작입니다. 얇은 동화책이지만 (1) 난민 문제에 대한 사회 일반의 합의 (2) 문학이 인간의 정신, 특히 유소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 (3) 작가의 의무와 책임 등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던져주는 까닭에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30대의 독자이고, 실제로 이 책을 읽게 될 어린이들과는 인생관, 배경지식, 판단력, 속한

연령대의 평균적인 사고방식 등 여러 면에서 크고작은 차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녀에게 이 책을 읽힐지 말지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저의 의견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내어 몇 자 적습니다.

 

2. 간략한 줄거리

 

주인공은 두 명의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입니다. 청각 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한국인 금비와, 고국 예멘에서 일어난 전쟁을 피해 가족들과 대한민국으로 와 난민으로 지내고 있는 아랍인 카림. 금비가 1인칭으로 작중의 모든 상황을 전달하고, 그 초점은 처음에는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던 카림과 서서히 우정을 키워가는 과정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태권도를 배울 생각도 하지 말라는 동네 학원의 관장님이나, 길고양이 루루가 시끄럽게 울어댄다고 빗자루로 때리려하는 꽥꽥 할머니 정도가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그나마 가장 못된 사람입니다. 반면 금비와 카림을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사비를 써가면서까지 도와주는 편의점 알바생 난희 누나와 같은 조력자 형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3. 주요 인물에 대한 작가의 시선, 그리고 난민 문제

 

카림과 그 가족,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다른 난민 가족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약자를 향한 연민, 더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난민과 그들을 수용하는 일에 지금보다 호의적인 태도로 임해달라 요청하고 있지요. ‘대한민국 땅에서는 태권도 승품 심사조차 받기 어려운, 우리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야라고 씁쓸히 내뱉는 어느 난민 남성을 향해 금비가 난민도 모두 같은 사람이에요! 유령이 아니라구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대목이 그 절정입니다. 저도 작가 분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동족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들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난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 여부, 수용된 난민들의 적응을 돕는 일 등이 주된 쟁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주류 사회에 매끄럽게 편입되지 못한 난민들이 치안상 혼란을 일으키며 사회의 불안요소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난 세기부터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난민을 대거 받아들인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이 오늘날 겪고 있는 상황을 그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이민과 외국인 인력의 수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이미 신생아수가 급감한 우리나라로서도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미 지방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서서히, 토종 한국인과는 다른 생김새를 가진 학생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 하에 본작과 같은 책이 출판시장에 서서히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4. 글월의 힘

 

이론과 기술 자체로서는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과학/공학과 달리, 모든 글과 책은 반드시 저자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또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와 엮여들기 쉽다는 속성을 지닙니다. 특히 유소년기에는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장성하여 살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관점 하에 쓰인 여러 책을 읽으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건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어른들이 잘 이끌어야겠습니다.

 

5. 덧붙임

 

- 책 표지의 주 색상을 예쁜 연두색으로 선택한 것이 다소간 파격적입니다. 아마도 같은 계열의 출판물들 사이의 색감 상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편집부에서 내리신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 서평은 찰리북(@charliebook_insta)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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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
박이도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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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시인의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을 읽고

 

1. 나의 기록

 

저는 태어난 날부터 입대할 무렵까지, 목회자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참 많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충북 괴산에서 졸업하고, 청주로 유학을 갔지요. 열여섯 살,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는 초등학생 시절 개학 직전 몰아 해치우는 방학숙제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을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에게는 오히려 정체성을 이루고 자아를 확립하는 유용한 도구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왜 썼느냐?

 

딱 잘라 말해, 아주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이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등이 감옥에서 쓰인 걸작으로 유명하죠. 당시의 저로서도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새카만 밤, 아무도 없는 탓에 이불과 그릇의 배치까지 아침에 나갈 때 그대로인 모습의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무척 쓸쓸하여 나는 부모와 자연으로부터 유배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당시 느꼈던 외로움은 이전까지 자아 밖의 세계와, 친구들과의 시덥잖은 장난질에 몰두하던 스스로의 시선을 존재의 내면으로 강하게 잡아 끌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고독의 인도를 따라 어쭙잖고 거친 표현으로나마 삶과 죽음, 성애와 허무, 사람과 사회 등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고뇌하고, 또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느덧 삼십대, 일기쓰기에 익숙해진 지금, 기록에 대한 저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니체의 말대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기 바쁜 사람은 기록 따위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고교 3년 간 노트 8권 분량의 일기를 썼는데,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4년 간은 반 권의 노트를 간신히 채웠어요. 다시 군생활 2년 동안은 노트 7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고, 제대 후부터 지금까지는 자유와 속박의 양극 사이 어딘가에서 비틀거리며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매일을 붙잡아둡니다.

 

둘째,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는 게 당장은 귀찮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모두 미래의 자신을 위해 사료(史料)를 마련해두는 중요한 일이더군요. 가끔 1년 전의 오늘, 2년 전의 오늘 ... 10여 년 전의 오늘까지 일기를 따라 거슬러가보는 버릇이 있는데, 그때마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초봄마다 어김없이 꽃가루 알레르기에 시달린다던지, 이별이나 투자손실 등 뼈아픈 사건을 겪을 때면 온갖 슬프고 비참한 어구들을 끌어와 자기연민에 빠졌다가도, 이듬해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행복을 찾아나서며 여러 기대에 부풀어 있다던지 등등.

 

2. 시인의 기록

 

박이도 시인이 모으고 엮은 이 책도, 저의 일기처럼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의 기록이 저의 사사로운 기록보단 훨씬 높은 상징성과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 다르겠네요.

 

시인은 1938년 생으로, 경희대 국문과 졸업 후 모교에서 교수로 20여 년 간 일했습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등단하여, 같은 해 소설 부문에서 유명한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김승옥 작가와는 문단 동기입니다. 저처럼 목사님 아들이시기도 하구요.

 

그 후로 50여 년 간 시인께서 얼마나 많은 문인들과 문학을 논하고 우정을 나누셨을지, 한참 뒤에 태어난 저로서는 아득히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따름이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이 책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을 통해 문단 내에서 평생 가꾸어온 교류의 자세한 실체와 시대의 면면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들을 모으고 엮어 출판했습니다.

 

3. 책의 구성과 읽기의 맛과 멋

 

책은 1부 시담, 2부 편지, 3부 엽서와 메모, 4부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1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년 말 펴낸 개정판에 추가된 내용입니다. 시담만으로 이루어진 개정 이전 판본의 제목은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구성이 이러한 까닭에, 분량이나 내용의 중요도 면에서 1부 시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큽니다. 시인으로 지내오며 연락을 주고 받은 문인들마다 너댓 페이지 씩을 할애하여, 일일이 안부를 묻는 가상의 편지, 주요작품 일부 구절의 소개, 마지막으로는 그들 각자와 얽힌 추억에 대한 회고담을 빼곡하게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시인께서 연세가 지긋하시다 보니 개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많아서, 위에 언급한 가상의 편지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의 이야기로 되어갈 때면 가슴 뭉클한 대목이 많습니다. ‘형님 떠나신 그곳에도 소주가게가 있으신가’, ‘먼 길 가신 형의 아드님도 이번에 의젓한 시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온 세계가 괴질(코로나19)로 신음하는 지금, 그대가 시로 힘차게 노래하던 생명의 약동이 꿈만 같소하는 등의 구절을 읽을 때면, 절절하면서도 운치있게 노래하는 시인의 그리운 마음이 느껴져 절로 콧잔등이 시큰해져왔어요.

 

동료 및 선후배 문인들의 시와 소설을 평하는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안목도 살아있음은 물론입니다. 우리 문단의 산 증인 그 자체와 같은 분이더군요. 서정주, 이청준, 황순원, 박목월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분들도 여럿 있지만, 식견이 좁은 저에게는 그렇지 않은 이름들도 많았는데 그분들에 대해서도 새로이 이모저모 알아가는 읽기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 이 서평은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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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세계 -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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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라얀과 군대 짬밥

 

민주화. 좋은 말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골치아픕니다. 정치적 견해를 끼워넣어 싸우지 말고, 지금은 글자와 뜻만 짧게 살펴봅시다.

 

백성 민, 주인 주, 될 화.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 정도겠네요. 그런데 어떻게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1) 눈오는 겨울,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이어폰으로 카라얀이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차이코프스키 발레 조곡을 듣는 제 자신의 모습입니다. 2세기 전 죽은 동유럽 작곡가가 지은 작품을 1세기 전 서유럽의 위대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취입하였고, 그 아름다움을 오늘날의 제가 첨단 장비로 생생히 누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극복한 문화생활입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다름아닌 맥스웰 방정식과 전자공학/통신기술에 힘입은 바 큽니다. 정확히는 갤럭시 버즈와 유튜브 덕분이지요. 뛰어난 연주를 기록하여 반영구적으로 재생가능하도록 보존한다. 이만큼 직관적이고 확실한 예술의 전파 방법이 또 있을까요.

 

(2) 군대 사병 및 예비군 식단의 커다란 개선입니다. 꽃다운 청년기에 징집당하여 복무하는 이들에게 개밥만도 못한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던 국군 급양체계에 최근 몇 년 사이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이 또한 맥스웰 방정식과 전자공학/통신기술에 힘입은 바 큽니다. 정확히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페이스북 덕분이지요. X같은 예비군 점심밥을 있는 그대로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것만큼 직관적이고 확실한 공론화의 방법이 또 있을까요.

 

, 이제 당신께 묻습니다. 과연 이러한 편의와 개선에 주류 이데올로기와 강단철학은 얼마나 기여했습니까? 많은 경우 그들의 몫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물론 체제를 구성하고 제도를 지배하는 사상의 힘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다 즉각적이고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것은 명백히 기술문명의 힘입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얼핏 군왕과 종교지도자들, 사상가와 철학자들만의 놀이터로 보이기 쉬운 세계사의 진정한 추동력은 공학과 기술, 보다 본질적으로는 측정 및 수량화이라는 행위에 있었음을 찬찬히 밝혀내지요.

 

2. Code name : 측정

 

한 분야에서 길고 복잡한 논리를 펴거나, 다양한 분야에서 짧고 간단한 논리를 늘어놓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복잡다단한 논리를 펴기는 훨씬 어려운데, 저자는 그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언론인 본연의 필력과 취재정신을 통해서요.

 

집필동기는 단순합니다.

 

“1m는 왜 1m인가? 1kg은 왜 1kg인가?”

 

얼핏 순환론적인 이 물음에서 출발하여, 저자는 유사 이래 주요한 측정 행위들과 그것들을 낳은 시대적 맥락, 나아가 그것들이 촉발한 당대의 문화/정치적 투쟁과 결과 등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고, 평가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고대 이집트의 측량과 고대 그리스의 추상화 정신. 근대 수학(확률론과 정규분포)과 물리학(뉴턴역학, 통계역학)이론의 발전. 학문의 결실을 권력이 전용해가는 과정(정치에 쓰이는 통계, 우생학, IQ). 프랑스 대혁명과 그를 이끈 계몽정신의 비장한 현현(미터와 킬로그램 원기의 제작). 나폴레옹 이후 혁명 사상을 받아들인 유럽 각국이 미터법에 대해 취한 스탠스와, 그것이 당대의 민족주의 및 국제주의에 미친 영향. 브렉시트를 전후하여 영미권과 EU 간에 벌어진 미터법 도입을 둘러싼 신경전. 측정과 수치에 과하게 의존하는 현대인의 경향(셀프 트래킹, 구글과 메타의 맞춤 광고).

 

3. 주요 논점

 

(1) 과학의 탈주술화 : 일부 신화학자들이 말하듯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해와 경이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무언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쌓아간다 해서 반드시 그것이 덜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2) 기술의 가치중립성 : 측정의 행위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나, 그 개량과 활용은 철저히 목적지향적, 특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입니다.

 

(3) 정량화의 파도에 저항하는 문사철의 정신 :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대표적입니다. 이 작품의 화자는 기계론이 승리하여 우주 모든 입자의 운동이 낱낱이 예측가능해지더라도, 나는 단지 당신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돌발행동을 할 거야.’라고 말하지요. 과학혁명 이후의 대세를 명백히 거스르는 태도이지만, 세계의 모든 측면을 수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4. 나가며

 

(1) 이 서평은 까치글방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사족 : 저자가 영국인이라 어쩔 수 없는 걸까요. 대영제국이 수백 년 간 저질러온 온갖 추접한 악행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한 언어로 스리슬쩍 넘어가고, 미국의 토지구획과 그에 따른 인디언 학살, 월남전에서의 미국의 만행만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대목은 조금 우스웠습니다. 영국인들이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박해해온 죄없는 사람의 숫자는 그 어느 단일 국가가 해친 사람의 숫자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말이죠.


#까치 #출판사 #측정의세계 #서평 #서평단 #제임스빈센트 #독서모임 #역사책 #문학 #측정 #물리학 #통계학 #기록 #2023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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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하게 안녕 - 그리운 아버지를 향한 애도 에세이
지월(왕희은) 지음 / 미다스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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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월 작가의 <애틋하게 안녕>을 읽고

1. 들어가며

희곡 및 에세이 작가로 활동 중이신 '지월(필명)' 님의 신간입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이태 전 하늘로 떠나신 작가 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유년기, 청소년기의 추억부터 투병생활과 작별의 순간, 장례 이후의 일들까지 40여 꼭지의 글이 묶여 있습니다.

2. 피할 수 없는 일

살아가다 보니 '나도 정말로 이런 것을 겪게 될까?' 싶은 사건들과 차례로 마주하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수능, 대입, 군복무, 복학, 취업, 퇴사, 주식투자, 스케일링, 사랑 등이 그러했습니다. 무엇 하나 피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이따금 마음이 박살나고 무너져내릴 때도, 아예 주저앉아 버릴 작정이 아닌 이상은 반드시 극복하고 일어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의 이별도 그런 일들 중 하나겠지요. 30대에 접어든 이후로, 귀한 친구나 지인들의 부친상/모친상을 알려오는 연락을 전보다 자주 받게 됩니다. 조용히 위로를 건네고 장례식장을 벗어날 때마다 연로하신 내 부모님의 호호백발을 떠올립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내게도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다' 되뇌이면서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떨리지만 의연하게 마주해야겠지요. 아직 겪어본 적 없는 이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그리움과 아픔을 견디고, 그것을 문필로 승화시킨 작가님처럼 용기를 내어서요.

3. 작가 님과 작가 님의 아버지에 대하여

작가 님의 아버지는 생전 자타공인의 딸바보이셨던 모양입니다. 딸이 먹고 싶거나 갖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든 마련해주려 애쓰고, 술에 취해서도 딸의 하교길에서 딸의 얼굴만을 바라며 가만히 기다리는 다정다감한 아버지. 생명이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견디고, 독한 항암치료로 섬망이 올 때조차 가족들의 전화번호 뒷자리를 무의식중에 반복하여 누르는,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

그런 까닭일까요. 작가님이 겪으셨을 아픔에 마음이 저려오는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크고 많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받은 가정이라는 생각에 부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4. 나와 나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우리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우리 부자는 서로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물음에 홀로 답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가 님의 아버지가 자타공인의 딸바보라면, 우리 아버지는 아들천재에 가까운 분입니다. 정겹고 살가운 것 따위 못 견뎌하시고, 성미를 거스르는 대상에게는 아직도 주먹과 육두문자가 먼저 나갑니다. 설령 그게 가족일지라도요. 개인사를 자세히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서툰 옛 시대의 남성상에 가까운 분입니다.

작가 님의 아버지께서 딸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격려를 해주셨다는 몇몇 대목을 읽을 때면 ‘진짜 저런 아버지도 있구나’하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아버지에게서 진심어린 칭찬을 들어본 적이 딱 두 번 뿐이거든요.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입니다. 그때마저도 쿨하게 ‘고생했다. 닭갈비나 먹으러 가자’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20대 초반,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시절에 ‘허섭쓰레기 같은 짓 말고 군대로나 빨리 꺼져라’라는 말을 듣고 속이 너무 상해서 혼자 동네 놀이터에서 소주를 들이키고는 술냄새 풍기며 대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이 새끼가 미쳤나’하면서 따귀를 날리셨습니다.

그랬던 아버지와 처음 가까워진 것은 일병 휴가를 나와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감히’ 마주보고 술을 마시면서부터였습니다. 취기가 오르니 담배가 피고 싶어 우물쭈물대며 ‘저 아버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하니, 아버지께서 ‘너 담배 피우지 않냐? 맞술도 하는데 담배는 뭔 상관이냐. 인간의 허례허식 싫다 나는. 그냥 여기서 불 붙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처음 공과금을 낼 때나, 자취방 임대차계약서 쓰는 것이 무서워 전화로 이것저것 여쭤보려 할 때면 언제나 수화기 너머로 껄껄 웃으시면서 ‘야, 나 죽으면 무덤까지 따라와서 물어볼거냐? 니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 세상 쿨한 나의 아버지. 두렵고 미웠던 적도 많지만, 지금은 ‘저 자식이 잘 하고 있나' 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무리의 대장 고양이 같은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5. 나가며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는 먼 곳으로 떠나시겠지요. 최근 몇 년 사이 아버지를 팔씨름으로 꺾을 때나, 아버지의 쭈그러든 전완근, 성성한 흰머리를 볼 때마다 새삼 깨닫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 싶다고는 솔직히 말 못하겠습니다. 다만 내세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부자의 역할을 바꾸어서 제 자식으로 아버지께서 한번 태어나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라면서 두들겨 맞은 것의 ¼ 정도만 돌려드리고(농담입니다), 나머지는 오직 뜨거운 사랑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평생 받아보신 적 없는 사랑으로 듬뿍 채우며 아버지의 상처 많은 영혼을 안아드리고 싶어요.

살면서 아버지 생각을 이토록 길게, 또 오래 해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미뤄왔던 가족사진, 너무 늦기 전에 올해는 꼭 찍어두어야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주름진 두 손 포개어 꼭 잡고요.

감사합니다, 작가 님 :)


* 이 서평은 작가 님(@wang_schrift)과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은 후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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