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측정의 세계 -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3년 12월
평점 :
1. 카라얀과 군대 짬밥
민주화. 좋은 말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골치아픕니다. 정치적 견해를 끼워넣어 싸우지 말고, 지금은 글자와 뜻만 짧게 살펴봅시다.
백성 민, 주인 주, 될 화.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 정도겠네요. 그런데 어떻게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1) 눈오는 겨울,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이어폰으로 카라얀이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차이코프스키 발레 조곡을 듣는 제 자신의 모습입니다. 2세기 전 죽은 동유럽 작곡가가 지은 작품을 1세기 전 서유럽의 위대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취입하였고, 그 아름다움을 오늘날의 제가 첨단 장비로 생생히 누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극복한 문화생활입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다름아닌 맥스웰 방정식과 전자공학/통신기술에 힘입은 바 큽니다. 정확히는 갤럭시 버즈와 유튜브 덕분이지요. 뛰어난 연주를 기록하여 반영구적으로 재생가능하도록 보존한다. 이만큼 직관적이고 확실한 예술의 전파 방법이 또 있을까요.
(2) 군대 사병 및 예비군 식단의 커다란 개선입니다. 꽃다운 청년기에 징집당하여 복무하는 이들에게 개밥만도 못한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던 국군 급양체계에 최근 몇 년 사이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이 또한 맥스웰 방정식과 전자공학/통신기술에 힘입은 바 큽니다. 정확히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페이스북 덕분이지요. X같은 예비군 점심밥을 있는 그대로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것만큼 직관적이고 확실한 공론화의 방법이 또 있을까요.
자, 이제 당신께 묻습니다. 과연 이러한 편의와 개선에 주류 이데올로기와 강단철학은 얼마나 기여했습니까? 많은 경우 그들의 몫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물론 체제를 구성하고 제도를 지배하는 사상의 힘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다 즉각적이고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것은 명백히 기술문명의 힘입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얼핏 군왕과 종교지도자들, 사상가와 철학자들만의 놀이터로 보이기 쉬운 세계사의 진정한 추동력은 공학과 기술, 보다 본질적으로는 ‘측정 및 수량화’이라는 행위에 있었음을 찬찬히 밝혀내지요.
2. Code name : 측정
한 분야에서 길고 복잡한 논리를 펴거나, 다양한 분야에서 짧고 간단한 논리를 늘어놓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복잡다단한 논리를 펴기는 훨씬 어려운데, 저자는 그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언론인 본연의 필력과 취재정신을 통해서요.
집필동기는 단순합니다.
“1m는 왜 1m인가? 1kg은 왜 1kg인가?”
얼핏 순환론적인 이 물음에서 출발하여, 저자는 유사 이래 주요한 측정 행위들과 그것들을 낳은 시대적 맥락, 나아가 그것들이 촉발한 당대의 문화/정치적 투쟁과 결과 등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고, 평가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고대 이집트의 측량과 고대 그리스의 추상화 정신. 근대 수학(확률론과 정규분포)과 물리학(뉴턴역학, 통계역학)이론의 발전. 학문의 결실을 권력이 전용해가는 과정(정치에 쓰이는 통계, 우생학, IQ). 프랑스 대혁명과 그를 이끈 계몽정신의 비장한 현현(미터와 킬로그램 원기의 제작). 나폴레옹 이후 혁명 사상을 받아들인 유럽 각국이 미터법에 대해 취한 스탠스와, 그것이 당대의 민족주의 및 국제주의에 미친 영향. 브렉시트를 전후하여 영미권과 EU 간에 벌어진 미터법 도입을 둘러싼 신경전. 측정과 수치에 과하게 의존하는 현대인의 경향(셀프 트래킹, 구글과 메타의 맞춤 광고).
3. 주요 논점
(1) 과학의 탈주술화 : 일부 신화학자들이 말하듯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해와 경이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무언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쌓아간다 해서 반드시 그것이 덜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2) 기술의 가치중립성 : 측정의 행위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나, 그 개량과 활용은 철저히 목적지향적, 특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입니다.
(3) 정량화의 파도에 저항하는 문사철의 정신 :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대표적입니다. 이 작품의 화자는 ‘기계론이 승리하여 우주 모든 입자의 운동이 낱낱이 예측가능해지더라도, 나는 단지 당신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돌발행동을 할 거야.’라고 말하지요. 과학혁명 이후의 대세를 명백히 거스르는 태도이지만, 세계의 모든 측면을 수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4. 나가며
(1) 이 서평은 까치글방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사족 : 저자가 영국인이라 어쩔 수 없는 걸까요. 대영제국이 수백 년 간 저질러온 온갖 추접한 악행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한 언어로 스리슬쩍 넘어가고, 미국의 토지구획과 그에 따른 인디언 학살, 월남전에서의 미국의 만행만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대목은 조금 우스웠습니다. 영국인들이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박해해온 죄없는 사람의 숫자는 그 어느 단일 국가가 해친 사람의 숫자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말이죠.
#까치 #출판사 #측정의세계 #서평 #서평단 #제임스빈센트 #독서모임 #역사책 #문학 #측정 #물리학 #통계학 #기록 #2023측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