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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하게 안녕 - 그리운 아버지를 향한 애도 에세이
지월(왕희은) 지음 / 미다스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지월 작가의 <애틋하게 안녕>을 읽고
1. 들어가며
희곡 및 에세이 작가로 활동 중이신 '지월(필명)' 님의 신간입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이태 전 하늘로 떠나신 작가 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유년기, 청소년기의 추억부터 투병생활과 작별의 순간, 장례 이후의 일들까지 40여 꼭지의 글이 묶여 있습니다.
2. 피할 수 없는 일
살아가다 보니 '나도 정말로 이런 것을 겪게 될까?' 싶은 사건들과 차례로 마주하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수능, 대입, 군복무, 복학, 취업, 퇴사, 주식투자, 스케일링, 사랑 등이 그러했습니다. 무엇 하나 피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이따금 마음이 박살나고 무너져내릴 때도, 아예 주저앉아 버릴 작정이 아닌 이상은 반드시 극복하고 일어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의 이별도 그런 일들 중 하나겠지요. 30대에 접어든 이후로, 귀한 친구나 지인들의 부친상/모친상을 알려오는 연락을 전보다 자주 받게 됩니다. 조용히 위로를 건네고 장례식장을 벗어날 때마다 연로하신 내 부모님의 호호백발을 떠올립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내게도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다' 되뇌이면서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떨리지만 의연하게 마주해야겠지요. 아직 겪어본 적 없는 이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그리움과 아픔을 견디고, 그것을 문필로 승화시킨 작가님처럼 용기를 내어서요.
3. 작가 님과 작가 님의 아버지에 대하여
작가 님의 아버지는 생전 자타공인의 딸바보이셨던 모양입니다. 딸이 먹고 싶거나 갖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든 마련해주려 애쓰고, 술에 취해서도 딸의 하교길에서 딸의 얼굴만을 바라며 가만히 기다리는 다정다감한 아버지. 생명이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견디고, 독한 항암치료로 섬망이 올 때조차 가족들의 전화번호 뒷자리를 무의식중에 반복하여 누르는,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
그런 까닭일까요. 작가님이 겪으셨을 아픔에 마음이 저려오는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크고 많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받은 가정이라는 생각에 부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4. 나와 나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우리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우리 부자는 서로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물음에 홀로 답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가 님의 아버지가 자타공인의 딸바보라면, 우리 아버지는 아들천재에 가까운 분입니다. 정겹고 살가운 것 따위 못 견뎌하시고, 성미를 거스르는 대상에게는 아직도 주먹과 육두문자가 먼저 나갑니다. 설령 그게 가족일지라도요. 개인사를 자세히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서툰 옛 시대의 남성상에 가까운 분입니다.
작가 님의 아버지께서 딸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격려를 해주셨다는 몇몇 대목을 읽을 때면 ‘진짜 저런 아버지도 있구나’하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아버지에게서 진심어린 칭찬을 들어본 적이 딱 두 번 뿐이거든요.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입니다. 그때마저도 쿨하게 ‘고생했다. 닭갈비나 먹으러 가자’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20대 초반,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시절에 ‘허섭쓰레기 같은 짓 말고 군대로나 빨리 꺼져라’라는 말을 듣고 속이 너무 상해서 혼자 동네 놀이터에서 소주를 들이키고는 술냄새 풍기며 대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이 새끼가 미쳤나’하면서 따귀를 날리셨습니다.
그랬던 아버지와 처음 가까워진 것은 일병 휴가를 나와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감히’ 마주보고 술을 마시면서부터였습니다. 취기가 오르니 담배가 피고 싶어 우물쭈물대며 ‘저 아버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하니, 아버지께서 ‘너 담배 피우지 않냐? 맞술도 하는데 담배는 뭔 상관이냐. 인간의 허례허식 싫다 나는. 그냥 여기서 불 붙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처음 공과금을 낼 때나, 자취방 임대차계약서 쓰는 것이 무서워 전화로 이것저것 여쭤보려 할 때면 언제나 수화기 너머로 껄껄 웃으시면서 ‘야, 나 죽으면 무덤까지 따라와서 물어볼거냐? 니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 세상 쿨한 나의 아버지. 두렵고 미웠던 적도 많지만, 지금은 ‘저 자식이 잘 하고 있나' 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무리의 대장 고양이 같은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5. 나가며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는 먼 곳으로 떠나시겠지요. 최근 몇 년 사이 아버지를 팔씨름으로 꺾을 때나, 아버지의 쭈그러든 전완근, 성성한 흰머리를 볼 때마다 새삼 깨닫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 싶다고는 솔직히 말 못하겠습니다. 다만 내세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부자의 역할을 바꾸어서 제 자식으로 아버지께서 한번 태어나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라면서 두들겨 맞은 것의 ¼ 정도만 돌려드리고(농담입니다), 나머지는 오직 뜨거운 사랑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평생 받아보신 적 없는 사랑으로 듬뿍 채우며 아버지의 상처 많은 영혼을 안아드리고 싶어요.
살면서 아버지 생각을 이토록 길게, 또 오래 해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미뤄왔던 가족사진, 너무 늦기 전에 올해는 꼭 찍어두어야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주름진 두 손 포개어 꼭 잡고요.
감사합니다, 작가 님 :)
* 이 서평은 작가 님(@wang_schrift)과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은 후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