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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피 ㅣ 블랙 캣(Black Cat) 13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문학으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나라는 어디일까? 본고장인 미국, 홈즈의 영국, 그리고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 정도가 될 것이다. 이번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작품은 그런 나라들과는 좀 떨어져 있는, 적어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나라의 작품이다. 세계지도를 볼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 '아이슬란드'의 작가가 쓴 작품이니까.
아이슬란드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다. 축구선수 구드욘센이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면. 나름 각국의 수도이름을 잘 알고 생각했던 나지만 이곳의 '레이캬비크'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 언어도 무엇을 쓰는지 잘 모르겠고, 국기도 노르웨이나 핀란드와 비슷했던가 정도로 알고 있고. 인구 30만의 이 나라에서 베스트셀러로 분류되려면 몇 부 정도가 팔려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이 몇 만부 팔리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인데..이곳에서는 1~3천부 정도면 굉장한 베스트 셀러가 되려나..
내 무식을 드러내려는 건 아니고, 작품 속에서 계속 아이슬란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나도 내가 아는 아이슬란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 것이다. '아이슬란드에서 이런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이런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범죄는 무엇일까..과연 어떤 느낌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에겐 너무나 잘 맞는 작품이다. 유능한 경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심농의 작품과 같은 느낌과 에드 맥베인의 경찰소설이 혼합된 느낌이다. 에를렌두르라는 경감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사건 수사와 여느 중년 남자 주인공처럼 가정에서는 그닥 좋지 않은 사정, 그리고 불만도 있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부하들이 펼치는 수사까지.
마약중독의 딸이 있고, 남들은 다 있는 부인도 오래전에 이혼해서 없는 것을 보면 좀 더 불쌍한 주인공이다. 항상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피곤에 절어있는 모습은 다른 주인공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중후한 모습조차 사라진 모습이고. 작가는 이런 주인공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인지, 주변에서 이런 주인공과 같은 형사의 모습을 보아왔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렇지만 역시 자신의 일터에만 오면 강해지는 주인공이다. 60대 노인이 재떨이에 맞아 살해당한 사건을 통해 그의 과거와 주변 모습들을 조사해 나가면서 진상을 밝혀내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접근법을 통해 욕을 먹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역시 모두 그를 따르게 되는 전형적인 유능한 경감이기도 하다.
사건 자체는 'I am HIM' 이라는 한 장의 종이 메시지가 시체 위에 놓여 있긴 했지만, 대단히 복잡하거나 트릭이 따로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가가 '아이슬란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쓴다'고 말했듯, 현실에서 볼 수 있을만한 있음직한 사건이다. 덕분에 아이슬란드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역시 사람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픔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주인공 자신이 그렇고, 결혼식장에서 도망쳤던 곁가지로 등장했던 사건의 주인공이 그랬고,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피해자들이 그랬다. 아프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꺼내어 해결하는 것이 좋은 것일지, 덮어 두고 쉬쉬하며 지내는 게 좋은 것일지 모르겠다. 작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목 '저주받은 피' 도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명확해지는 제목과 자신의 피가 저주를 받았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 역시. <Jar City>라는 영어 제목은 작가의 앞으로 작품의 성향을 보여줄 것이기에 일반적인 제목이 될 것 같아 <Tainted Blood>로 바꾼 것도 같다. 아직 다른 작품을 읽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책을 읽기 전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슬픈 소설. 마지막 장면은 나의 무장을 해제시켰고, 어떤 추리소설도 줄 수 없었던 감동을 안겨주었다.' 띠지에 있는 광고가 사실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저 말이 나에게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아 뿌듯하다. 트릭을 통한 머리싸움, 반전이 아닌 여운이 남는 작품을 원한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반전이 내 머리를 누군가 때리는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가슴을 송곳으로 후비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난 비슷한 여운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작가의 다음 작품 <무덤의 침묵>을 주문했다.
p.s. The Glass Key Award. 더쉴 해밋의 작품이름인데, 아직 읽어 보지 못하긴 했지만, 이름이 참 멋지다. 발음이 입에 달라붙는 느낌도 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