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그리다 - 초상화가 정중원 에세이
정중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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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털 하나, 모공 한 점까지 변태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하이퍼리얼리즘 화가 정중원이 쓴 <얼굴을 그리다> 는 스마트폰과 카메라가 세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록하는 디지털 시대에 왜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얼굴을 그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얼굴에 담긴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시작부터 우리가 매일 남의 얼굴은 지겹게 보면서 정작 내 진짜 얼굴은 평생 단 한 번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는 태생적 킹받는 한계를 콕 집어낸다. 거울이나 폰 카메라는 결국 좌우가 바뀌거나 왜곡된 짭일 뿐이며, 인간이 왜 그렇게 자화상에 집착하고 현대인들이 왜 그렇게 보정 앱에 목숨을 거는지 그 이유가 바로 내 진짜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감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요즘처럼 아이폰 화질이 좋은 세상에 왜 굳이 돋보기 들고 밤새 가며 똑같이 그리냐는 시니컬한 질문에 대해서도 붓끝으로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사진은 기계가 천 분의 일 초 만에 찰칵하고 끝내지만 초상화는 화가가 대상과 눈을 맞추며 보낸 수백 시간의 피 땀 눈물이 압축된 노가다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그림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묘한 소름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대상을 향한 화가의 지독한 짝사랑과 집착이 만들어낸 예술적 기시감이다. 게다가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연극 무대에 서는 프로 투잡러인 저자는 인간의 얼굴을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갈아끼우는 가면, 즉 페르소나로 바라보며 썰을 풀어낸다. 고흐의 짠내 나는 서사부터 그리스 신화, 과학 이론까지 온갖 맛있는 양념을 버무려 우리가 어떻게 가면을 쓰고 타인과 밀당을 하며 살아가는지 흥미진진하게 털어놓는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정성 어린 붓질과 밀도 높은 문장은 독자에게 타인의 얼굴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는 동시에 거울 속 나의 진짜 얼굴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묵직한 울림과 깊은 사유를 선사한다. 품격 미술관이자 나를 찾아가는 꿀잼 인문학 가이드 다들 한번 추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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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6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지음, 박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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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E.T.A.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은 굉장히 독창적인 액자식 구조를 가진 풍자 소설이다. 인쇄소 직원의 실수로 천재 고양이 '무어'의 자서전과, 비운의 음악가 '요하네스 크라이슬러'의 평전 인쇄 원고가 뒤섞여 출간되었다는 기발한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이 기묘한 이중주는 인간 사회의 허위의식과 예술가의 고독한 운명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첫 번째 주인공인 스트릿 출신 수고양이 무어는 스스로를 '묘(猫)계의 괴테'라 믿는 근자감의 소유자. 나름 책을 읽을 줄 알고 말도 할 줄 아는 보통이 아닌 이 고양이는 인간의 책을 몇 권 훔쳐 읽고는 온갖 고상한 척, 지적인 척은 다 하지만, 실상 그의 관심사는 오직 따뜻한 아랫목과 맛있는 츄르뿐이다. 겉으로는 고결한 영혼을 읊조리며 속으로는 안락함만 추구하는 무어의 뻔뻔함은, 당시 교양 있는 척 폼을 잡던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속물근성을 때리는 고단수 풍자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무어의 이면지를 차지한 악장 크라이슬러는 호프만의 영혼을 갈아 넣은 페르소나이다. 속물적인 귀족 사회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오직 순수 예술만 고집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또라이 취급을 받는다. 안락한 묘생을 즐기는 무어와 달리, 크라이슬러의 삶은 짠내 나는 비극과 예술적 고뇌로 가득 차 있다. 캣타워 위에서 세상을 논하는 고양이의 귀여운 헛소리에 낄낄거리다가도, 책장을 넘기면 크라이슬러의 처절한 심연이 고개를 내민다. 작가가 의도한 '편집 오류' 구조는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고결한 이상과 세속적인 생존 본능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혼돈의 공간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스마트폰으로 인문학 유튜브를 보며, 책 몇 권 읽고 지적 허세를 부리는 우리의 모습은 무어와 얼마나 다를까..ㅋ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호프만이 던지는 날카로운 위트와 유머는, 타성에 젖어 살아가던 우리의 일상에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죽비가 되어 뼈를 때린다. 속물적인 세상에서 진정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근데 왜 하필 고양이였을까ㅋ 궁금해 잠깐 찾아봤는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호프만이 지독한 애묘인이었다고. 실제로 그가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 '무어(Murr)'였는데 호프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진짜 고양이 무어는 호프만이 글을 쓸 때 책상 위로 올라와 원고지를 밟고 지나가거나, 서랍을 열어 대본을 뒤적거리는 등 '고양이는 왜 그럴까' 행동을 자주 했고, 호프만은 반려묘의 그 영악하고 영리한 눈빛을 보며 "저 녀석, 속으로는 인간을 비웃으며 지 자서전을 구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현실로 옮겼다고 한다. 아..여튼 결론은 고양이 나만 없어..ㅠ


PS. 이쯤에서 생각나는 단편 하나, 미야자와 겐지의 <고양이 사무소>다.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과 미야자와 겐지의 <고양이 사무소>는 시공간을 초월해 ‘고양이를 통한 인간 사회의 지독한 풍자’라는 완벽한 교집합을 공유한다. 첫째, ‘인간 사회의 축소판’을 그렸다. 무어는 인간의 관직 체계와 학벌을 부러워하며 지식인 행세를 하고, <고양이 사무소>의 고양이들은 정장을 입고 서류를 만지며 관료 사회를 형성한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계급제와 출세욕을 고양이 세계에 그대로 이식한 셈. 둘째, 가차 없이 차별과 속물근성을 폭로한다. 안락함에 취해 길고양이 시절을 잊고 하층 고양이를 무시하는 무어의 모습과, 온몸이 까맣고 더럽다는 이유로 가장 일 잘하는 ‘화덕고양이’를 따돌리는 사무소 고양이들의 잔인함은 인간의 얄팍한 선민의식과 차별주의를 거울처럼 비춘다. 셋째, ‘냉소적인 경고’로 끝을 맺는 결말까지. 무어의 뻔뻔한 자기합리화나, 고양이들의 싸움에 질려 사무소를 폐쇄해 버리는 사자의 모습은 "너희 인간이나 고양이나 다를 게 없다"는 작가들의 서늘한 메시지로 통한다. 결국 호프만의 무어가 겉만 번지르르한 '개인'의 위선을 꼬집었다면, 겐지의 사무소는 그 위선이 뭉쳐 만든 '집단'의 잔인함을 고양이의 탈을 빌려 고발한 것. 여튼 <고양이 사무소>는 [미야자와 겐지 전집]에 실린 단편이다. 작은 앞발로 꼬물대며 잉크를 묻혀 서류를 정리하고, 양복 깃을 매만지며 에헴- 하고 출근하는 고양이들이라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귀엽다ㅠ 하지만 겐지는 아주 좌니난ㅋ 작가라, 내가 그 귀여움에 정신 못 차리고 방심하고 있을 때 가차없이 죽비를 날리더라.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들도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인간들처럼 치졸하게 편을 가르고, 왕따를 시키고, 계급을 따진단다." 라며. 비록 결말은 사자의 호통으로 씁쓸하게 끝나지만, 머릿속에 남은 '책상 앞에 쪼르르 앉아 돋보기를 쓰고 서류를 검토하는 고양이 공무원들'의 비주얼만큼은 지우기 힘들 정도로 사랑스러운 소설인 건 분명함. 어쩌면 그 귀여운 상상력 덕분에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걸작이 된 게 아닐까.. 아, 여튼 결론은 또 고양이 나만 없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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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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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집 <겨울 여행>은 카탈루냐 문학의 거장이 정교하게 조율한 14개의 단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음악적 서사를 이루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에서 제목을 빌려온 책은 표면적으로는 시공간이 다른 독립된 이야기들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인물과 사물, 주제가 촘촘한 그물망처럼 연결된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가 던진 떡밥 회수’는 이 책의 백미. 바흐와 쇼팽의 선율이 흐르는 배경 속에서, 앞에서 스치듯 나온 바이올린이나 악보가 다음 장에서 슬그머니 재등장할 때의 소름은 웬만한 심리 스릴러 못지않다. 작가는 이 치밀한 설계를 통해 예술이 지닌 영원성과 인간 삶의 유한함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고독과 집착이라는 자신만의 '겨울 여행'을 보내는데, 예술적 완벽함에 중독된 음악가, 위작인 줄 알면서도 매료된 수집가, 역사의 광기 속에서 파멸해 가는 이들의 모습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카브레는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특유의 서사 기법으로 죄의식과 상실감,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겨울 여행>은 단순한 단편집을 넘어, 독자의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지적 퍼즐이다. 문장 사이의 공백을 채우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인간 존재의 서늘한 고독과 그럼에도 피어나는 예술의 가치를 마주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한 문장 안에서 뒤섞이고, 시점이 불쑥 전환되는 특유의 서사 기법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익숙해지면 거대한 퍼즐을 맞춰 나가는 듯한 지적 쾌감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의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재독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PS. <겨울 여행>은 인간의 죄의식, 예술의 구원 가능성,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상흔을 거장의 유려한 필치로 담아낸 띵작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나지막이 틀어놓고, 문장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연결고리를 따라가며 읽을 때 이 책의 진가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을 것ㅋ 단단하고 서늘하지만,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문학적 겨울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열치한ㅋㅋ 추라이 추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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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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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 "소설이란 모름지기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꼰대식 서사 문법에 시원하게 엿을 날린 포스트모더니즘의 마스터피스다. 이 책엔 줄거리랄 게 없다. 그냥 삼천포로 빠지는 걸 특기로 가진 47개의 엉뚱한 에피소드가 제멋대로 춤을 출 뿐이다. 작가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환상적이고도 기발한 언어로 그려내며, 기성 체제의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히피 문화 특유의 자유로움을 문체 전반에 투영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는 제목이기도 한 ‘미국의 송어낚시’의 끊임없는 변주다. 소설 속에서 이 단어는 고정된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 자연 속에서의 낚시 행위였다가, 어느 순간 인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고, 호텔 이름이나 편지 하단의 서명,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신적 상태를 대변하는 추상적 개념으로 시도 때도 없이 둔갑한다. 브라우티건은 하나의 언어가 맥락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언어 유희를 통해 독자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 만든다.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물질주의에 오염된 미국적 유토피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본래 맑은 시냇물과 송어낚시는 자연의 순수함과 미국 개척 시대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그러나 소설 속 미국은 이미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된 공간이다. 특히 자연 그대로의 시냇물을 피트(feet) 단위로 잘라서 판매하는 봉이 김선달 같은 에피소드는 자연마저 상품으로 전락한 현대 사회의 기괴한 단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유머로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맑은 눈의 광인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팩트 폭행을 날린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송어낚시>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일반적인 독서법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한 편의 초현실주의 시집이나 팝아트 작품을 감상하듯, 엉뚱한 비유와 시적인 문장들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낚시'다. 브라우티건은 이 황당무계한 낚시 이야기를 통해 가슴속에 맑은 시냇물 한 줄기 심어두는 법을 유쾌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여튼 제대로 된 기승전결을 기대했다간 '이게 대체 뭔 소린겨...' 싶겠지만, 꼰대 문학에 날리는 발칙한 조롱과 쪼개 파는 시냇물 소리에 낄낄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메마른 영혼도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PS.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유머는 한마디로 ‘천진난만한 얼굴로 기성 사회의 뼈를 때리는 맑은 눈의 광인 개그’다. 그의 유머는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기보다, 상식의 틀을 깨는 엉뚱한 비유와 맥락 파괴를 통해 독자의 허를 찌르며 피식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녀의 몸은 수표 같았다"거나 "양배추 같은 목소리"처럼 자본주의적 상징과 일상을 버무린 기묘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유쾌한 언어적 놀이다. 특히 그의 유머가 빛나는 지점은 가난, 고독,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무거운 비극을 다룰 때다. 그는 정색하고 분노하는 대신 "울기엔 너무 황당해서 그냥 웃어버리는" 허허실실 전법을 쓴다. 시냇물을 토막 내 파는 엽기적인 현실 앞에서도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구경하며 비극을 코미디로 세탁한다. 이는 지적 엄숙주의에 빠진 기성 문단을 향해 "뭘 그렇게 심각해?"라며 날리는 통쾌한 메롱이기도 하다. 그의 유머는 자극적이지 않지만, 팍팍한 세상에서 씁쓸한 현실을 다정하게 위로하는 슴슴한 매력을 지녔다. 이 책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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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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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한마디로 “현대 의학이 인공호흡기 달고 멱살 잡아서 억지로 살려놓은 수명, 과연 행복한가?”를 뼈 때리게 묻는 책이다. 저자는 의사 가운을 입고 나와서 “우리 의사들이 그동안 번지수를 잘못 짚었습니다”라며 의학계의 대반성문을 유쾌하고도 묵직하게 써 내려간다. 현대 의학은 인류의 수명을 늘리는 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문제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니라 ‘치료하면 완치되는 질병’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중환자실에서 온갖 콧줄과 호스에 묶인 채 ‘인간 사이보그’ 상태로 맞이하게 되었다. 성공 확률 1%의 독한 항암제를 권하며 “포기하지 마세요!”를 외치는 의사들 덕분에, 환자들은 가족들과 따뜻한 눈 맞춤 한 번 못 하고 픽셀 깨진 모니터 신호음 속에서 퇴장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의료 기술이 좋아질수록 죽어가는 과정은 오히려 잔인해지는 청개구리 같은 상황인 것이다. 현대식 요양원 시스템을 향한 풍자도 매섭다. 요즘 요양원은 환자의 안전과 위생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낙상 방지를 위해 침대에 묶어두고, 정해진 시간에 사료 주듯 밥을 먹인다. 군대보다 더 철저한 규칙 속에서 노인들은 안전하게, 하지만 지독하게 지루해서 말라 죽어간다. 가완디는 노인들에게 필요한 건 ‘멸균실 같은 안전’이 아니라, ‘오늘 간식으로 단팥빵을 먹을지 말지 결정하는 사소한 자율성’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요양원에 식물과 개, 고양이를 풀어놓았더니 노인들이 약을 끊고 생기를 찾았다는 황당하고도 감동적인 일화는 인간이 단순한 생명 유지 장치가 아님을 증명한다. 저자는 척수 종양에 걸린 제 아버지를 간호하며 직접 겪은 짠내 나는 에피소드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남이 똥 오줌을 닦아줘도, 내 손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축구 중계를 볼 수 있다면 그 삶도 오케이입니까?” 같은 얄짤없고 민망한 질문을 미리 나누라는 것이다. 이른바 ‘거시기한 대화’다. 이 불편한 수다 덕분에 저자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수술 대신 호스피스를 선택해 마지막 순간까지 와인을 마시며 존엄하게 커튼을 닫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 책은 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기가 아니라, Well-being만큼이나 Well-dying이 중요하다는 ‘인생 마감 전략서’이다. 어차피 인간의 치사율은 100%. 이 절대적인 법칙을 당연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살 것인가?”라는 진짜 중요한 인생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병원 모니터의 그래프를 1분 더 늘리기보다,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 손으로 담담하게 덮고 싶게 만드는, 이미 중년 독거인인 나 자신의 미래, 그리고 언젠가 맞이할 부모님의 마지막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 이 땅의 늙어가는 모두가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한다.


PS. 가완디는 이 씁쓸한 현실을 증명하기 위해 19세기 고전인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소환한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원인 모를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를 진짜 미치게 만든 건 통증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지독한 연기’였다. 의사와 가족들은 그가 곧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약 잘 먹으면 나을 거다”, “기운 내라”라며 희망 고문을 이어간다. 가완디는 백 년 전 이 소설이 사실은 현대 병원의 완벽한 예언서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의사들도 이반 일리치의 의사처럼 환자가 죽어간다는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온갖 검사와 치료법이라는 ‘의학적 핑계’ 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죽어가는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곧 나을 거다”라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함께 나누고 손을 잡아줄 진실한 사람인데 말이다. 참고로 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을 때 우리 나라도 존엄사를 허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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