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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 "소설이란 모름지기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꼰대식 서사 문법에 시원하게 엿을 날린 포스트모더니즘의 마스터피스다. 이 책엔 줄거리랄 게 없다. 그냥 삼천포로 빠지는 걸 특기로 가진 47개의 엉뚱한 에피소드가 제멋대로 춤을 출 뿐이다. 작가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환상적이고도 기발한 언어로 그려내며, 기성 체제의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히피 문화 특유의 자유로움을 문체 전반에 투영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는 제목이기도 한 ‘미국의 송어낚시’의 끊임없는 변주다. 소설 속에서 이 단어는 고정된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 자연 속에서의 낚시 행위였다가, 어느 순간 인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고, 호텔 이름이나 편지 하단의 서명,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신적 상태를 대변하는 추상적 개념으로 시도 때도 없이 둔갑한다. 브라우티건은 하나의 언어가 맥락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언어 유희를 통해 독자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 만든다.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물질주의에 오염된 미국적 유토피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본래 맑은 시냇물과 송어낚시는 자연의 순수함과 미국 개척 시대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그러나 소설 속 미국은 이미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된 공간이다. 특히 자연 그대로의 시냇물을 피트(feet) 단위로 잘라서 판매하는 봉이 김선달 같은 에피소드는 자연마저 상품으로 전락한 현대 사회의 기괴한 단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유머로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맑은 눈의 광인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팩트 폭행을 날린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송어낚시>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일반적인 독서법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한 편의 초현실주의 시집이나 팝아트 작품을 감상하듯, 엉뚱한 비유와 시적인 문장들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낚시'다. 브라우티건은 이 황당무계한 낚시 이야기를 통해 가슴속에 맑은 시냇물 한 줄기 심어두는 법을 유쾌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여튼 제대로 된 기승전결을 기대했다간 '이게 대체 뭔 소린겨...' 싶겠지만, 꼰대 문학에 날리는 발칙한 조롱과 쪼개 파는 시냇물 소리에 낄낄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메마른 영혼도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PS.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유머는 한마디로 ‘천진난만한 얼굴로 기성 사회의 뼈를 때리는 맑은 눈의 광인 개그’다. 그의 유머는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기보다, 상식의 틀을 깨는 엉뚱한 비유와 맥락 파괴를 통해 독자의 허를 찌르며 피식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녀의 몸은 수표 같았다"거나 "양배추 같은 목소리"처럼 자본주의적 상징과 일상을 버무린 기묘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유쾌한 언어적 놀이다. 특히 그의 유머가 빛나는 지점은 가난, 고독,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무거운 비극을 다룰 때다. 그는 정색하고 분노하는 대신 "울기엔 너무 황당해서 그냥 웃어버리는" 허허실실 전법을 쓴다. 시냇물을 토막 내 파는 엽기적인 현실 앞에서도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구경하며 비극을 코미디로 세탁한다. 이는 지적 엄숙주의에 빠진 기성 문단을 향해 "뭘 그렇게 심각해?"라며 날리는 통쾌한 메롱이기도 하다. 그의 유머는 자극적이지 않지만, 팍팍한 세상에서 씁쓸한 현실을 다정하게 위로하는 슴슴한 매력을 지녔다. 이 책의 백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