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하느님과 다가올 세계
프란치스코 교황.도메니코 아가소 지음, 이재협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쓰신 책입니다.

책에서 와닿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Q. 교황님,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우리를 힘든 상황에 그냥 버려두시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요

A. 물론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러한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적절한 때가 오면, 하느님께서 우리 손을 붙잡아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음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믿음이 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걷는 지상 여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불안과 근심의 씨앗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완전해지고 싶어 노심초사합니다. 종종 틀린 길을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과 근심이 예수님을 만나면, 은총이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을 건너가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으려고 하기 전에 이미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둠 속에서 "주님! 주님!" 하고 외칩니다. 주님께서 멀리 계시고 우리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대답하십니다.

"나 여기 있단다!"

반면 우리가 인생의 화려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잘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몇 발자국 잘 걷다가도 넘어지고 또다시 몇 발자국 잘 걷다가도 넘어지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아이를 일으켜 줍니다. 매번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그 손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당신에게 복종하기만을 바라는 계산적인 주인으로 여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아버지로 여기기를 바라시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다시 배에 올랐을 때,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러자 배에 있던 이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언젠가 우리 모두도 이들이 했던 고백을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교황님께서 알려주신 책 내용을 읽어보시길 권유드립니다:)

*가톨릭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심 생활 입문 가톨릭 클래식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지음,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신심생활에 필요한 글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필로테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필로테아는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 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애초에는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었으나 결국 여러 사람들을 위해 출간하기로 한 만큼, 누구든지 깊은 신심 생활을 지향하는 이들을 적합한 이름으로 호칭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신심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해두고 이 입문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했습니다.

제1부 신심 생활에 대한 동경

제2부 기도와 성사

제3부 수덕

제4부 일상적 유혹

제5부 영혼의 쇄신

제2부 기도와 성사에서 제12장 영적은둔을 작성하였습니다.

제12장 영적 은둔

친애하는 필로테아 님, 앞에서 내가 언급한 바를 그대가 충실히 지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그대의 영적 진보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르쳐 준 방법 중 하나를 이용하여 일과 중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성찰하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며 언제나 그대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를 바라보고 계신데 어찌하여 저는 항상 주님을 우러러보지 않는지 모르겠나이다. 주님께서는 늘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저는 왜 주님 생각을 조금밖에 하지 않는지 모르겠나이다."

"오! 내 영혼아, 너는 어디 있느냐? 네가 진정 쉴 곳은 하느님 곁인데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느냐?"

새들은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고, 사슴은 나무 그늘 아래서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골고타나 주님의 상처에서, 또는 틈나는 대로 주님의 곁에서 바쁜 세상사를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그곳을 세상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주님을 향해 "주님께서는 나의 파난처, 나의 산성이시여, 비를 막는 지붕이시고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십니다."(시편 91,2.9 ; 61,4 ; 62,3 참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차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필로테아 님, 그대 몸은 세상사에 매여 있지만, 그대 마음은 종종 피난처에 숨어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을지라도 그대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많습니다.

"오! 주님, 저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나이다."

"저는 언제나 저의 하느님을 뵈옵나이다."

"저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있나이다."

거룩한 은둔을 방해하는 세상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는 부모님의 방해로 기도할 곳이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카타리나의 마음 안에 작은 성당을 지어 주시어 아무리 바쁜 일과 중에라도 거룩한 은둔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성녀는 어느 누가 괴롭히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 비밀스러운 작은 성당에 숨어 하늘에 계시는 배필이신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녀의 영적 딸에게 마음속에 작은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수행하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대도 때때로 주위 사람들과 떨어져 하느님과 만나 마음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대 마음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다윗은 "저는 광야의 펠리칸과 같아지고, 페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되었습니다."(시편 102,7-8)하고 하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뜻깊은 말이며, 묵상을 위한 다윗 임금의 은둔의 습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구세주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골고탕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신 구세주께서는, 굶주린 자기 새끼에게 자기 피를 먹이는 광야의 펠리칸과 같으시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적막한 곳에서 슬피 우는 부엉이와 같으시며, 또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무리를 떠나 하늘로 날아가는 한 마리으 외로운 새와 같으십니다. 우리와 이와 같은 피난처를 지으면 번잡한 세상사 가운데서도 그곳에 숨을 수 있습니다.

프로방스 지방 아리안의 백작인 복자 엘제아르는 그의 부인 델핀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운 아내여, 나는 잘 지내고 있소. 만약 나를 만나고 싶으면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로 오시오. 나는 그곳에 있소. 다른 곳에서 나를 찾으면 헛수고일 뿐이오." 그가 표현한 예수님의 옆구리는 그의 피난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좋은 신앙서적인 신심생활입문 책을 통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은 곳의 빛 - 어둠을 넘어서는 희망의 빛
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 지음, 김희정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질문에 대해서 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 신부님 답해주시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관계(저는 소중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고독(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떠난다는 두려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침묵(침묵이 그 자체로 아름다우리라고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육체(살면서 제 육체를 지금만큼 생생하게 인지한 적은 없었습니다)

죽음(죽음이 남긴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책에서 와닿은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관계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인간적인 이유는 인간의 육체를 공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성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나눌 수 없도록 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고통이 불행과 좌절, 체념으로 치닫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

과학자나 의료진들은 전문적인 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면서도 인류애를 실현하려고 한다. 단순히 육체만 돌보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과학으로 채울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까지도 이루려 한다 .이것이 그들이 고통과 질병과 위험에 맞서려 하는 이유다.

고독

현명한 자세는 이 고독의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며, 고독을 경험하는 일에도 좋은 것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ㅇ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존재가 깊이 관여된 관계의 회로에서 분리됙 제외되고 버려져서 혼자 남겨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존재의 신비 앞에서 철저하게 혼자다. 이는 부정적인 고독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삶의 신비 앞에서 유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속감을 통해 건강한 방식으로 삶의 신비에 들 수 있다.

우리가 판단하여 결정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자유를 발견하고 누려야 한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져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피해자에서 주인공으로 말이다. 마음의 자세를 바꾸어서 끊임없이 울고 싶고, 틀어박히고 싶고, 옳지 않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고, 어두운 기운을 표출하고 싶고, 남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버렁진 상황에서도 책임감을 느끼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는 피해자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쥐는 이가 되도록 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기위해 고독의 시간과 상황을 선택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고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도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 그러고는 그 현실을 피해자가 되는 부당함을 딛고 주인공이 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고독은 관계의 부재가 아니라, 긍정적인 고독은 우리의 깊은 내면에 있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에서 고독의 시간은 현실이 덮거나 지우려 하는 각자의 정체성을 되돌려줄 수 있다.

우리가 고독에 빠져들 때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한계와 나약함을 딛고 풍성한 수확의 가능성을 위해 시도하라고, 깊은 곳으로 가라고 끊임없이 권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말을 신뢰하고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면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은총이 된다.

침묵

침묵은 우리가 내면에서 살도록 이끄는 문의 역할을 한다.

사실 침묵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지닌 우리 삶의 이야기와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엄청난 능력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내면이 수용적인 태도를 취할 때, 즉 자신의 이성과 사고와 관게를 능가하는 더 큰 무언가를 환대할 때 삶의 올바른 차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면에 있는 것들고 친숙해지려면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 있는 '군중'의 얼굴과 이름과 상황을 알아 가야 한다. 이러한 환대의 태도를 취해야 군중의 폭력적인 힘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의미 있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관계 안에서 선의 가치를 높이고, 무엇보다 먼저 선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부정적인 비판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볼 때 변화와 혁신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니 악이 아닌 선을 신뢰해야 한다. 냉정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가면이 벗겨져도 지속되는 사람과 만나면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진정한 친밀감이 샘솟는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 대한 미움의 감정도 떨칠 수 있다.

침묵은 우리를 내면으로 인도하고, 그 안에 있는 것을 파악하도록 한다. 그리고 '비판'하는 적을 물리치게 할 뿐안 아니라 위대한 경청의 자세로 이끌고 내적 자유의 문을 통과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존재가 폭력의 힘을 이기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 온유한 삶을 살게 해 준다.

육체

때때로 육체는 정신과 마음의 충동을 가라앉히는 곳이 되기도 한다.

육체와 내면은 이론적으로만 분리되고 현실에서는 항상 하나로 작용한다..

내면성이란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인 관계도 고려되어야 한다. 관게그 그 자체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관게를 통해 정보의 교환뿐만 아니라 서로의 경험도 교류한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관계가 일어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죽음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사실이지 논쟁의 주제가 아니다. 사실은 반드시 논쟁보다 앞서기 때문에 사실 앞에서 모든 추론은 중지된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추론이 없는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사실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려면 진정한 애도가 필요하다.

진정한 애도는 망각이 아니라 예언이다 .죽음의 힘이 사랑을 앗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절망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해야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더 잘 살게 하는 동기이지,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아니다.

에필로그

어둠 속에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다.

우리는 일상생활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야곱이 끝까지 놓지 않았듯이, 염원을 이루지 않고서 대결을 끝낼 수 없다. 우리의 삶에 깊이 새겨진 어둠과 악과 투쟁하고 험난한 상황 속에서 축복받고 선을 발견해야 한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것이 모두가 찾아야 할 '깊은 곳의 빛'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시련의 경험에서 축복을 차아야 한다. 우리를 불안케 하고 의문을 품게 하는 것에 숨겨진 선함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저주와 대립, 패배를 경험했던 것에서 축복을 받아야 한다.

어려운 시기가 지ㅏ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힘든 시기와 그 흔적은 어둠을 거치면서 끌어낸 축복과 선함의 표식이 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전추에서 승리할 무기가 없지만, 힘없이 쓰러져 더는 일어설 힘이 없다고 느낄 때도 게속 싸울 수 있다. 우리 안에는 기르고 드러내고 사용하고 알아야 할 힘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깊은 곳의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가톨릭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 - 안셀름 그륀 신부에게 던지는 75개의 질문
안셀름 그륀 지음, 신정훈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 책은 신앙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을 하기를 바라며 씌어진 책입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장 하느님 - 사랑과 자비의 모습을 지니신 분

-하느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사건이 있나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는 허구나 상상의 존재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나와 무관한 독립적인 실재이신가요?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나요?

-세상 도처에는 긱가 다른 하느님 상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을 말하는 건가요?

-하느님께서는 다른 많은 민족과 문화에서 어떤 존재이신가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 상보다 우월한가요?

-하느님과 나는 연결되어 있나요?

-인간이 하느님의 통역자가 될 수 있나요?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방식이나 하느님 상이 서로 다른가요?

-하느님께서는 시대마다 당신을 다르게 드러내시나요?

-세상의 실상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존재에 관한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나요?

-기적이 있나요?

-세상의 혼란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나요?

-그리스도인도 과학적 사고를 따를 수 있나요?

-인간과 무관한 악이 존재하나요? 악마는 실제로 존재하나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신가요?

-하느님께서 악하실 수 있나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벌하시나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오늘날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에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성령에 관한 은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도 활동하시나요?

제2장 예수님 - 내 삶의 이정표가 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인물인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나요?

-2천 년 이전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길과 그분의 생애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나요? 이것은 나에게 좋은 소식인가요?

-신앙과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나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새롭게 알 수 있나요?

-제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나요? 그분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나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니 남녀 간에 차이가 있나요?

-예수님께서는 현재 내 삶에 대안을 제시해 주시나요?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사시나요? 그곳에 예수님도 사시나요?

-현대 과학의 세계관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특정 장소를 없앤 건가요?

제3장 인간 - 하느님의 모상에 가까워지려는 이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요?

-믿는 이들은 늘 도덕적이며 바르게 행동하나요?

-나는 죄인인가요? 죄란 무엇인가요?

-나에게 영혼이 있나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나요?

-신앙과 구원은 서로 연관되나요?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인간에게 신적인 면이 있나요? 그렇다면 나에게 신적인 면은 무엇인가요?

제4장 신앙 -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린이의 믿음과 어른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앙을 받아들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신앙은 배워 익힐 수 있나요? 내가 원하면 신앙이 생길 수 있나요?

-신앙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인가요?

-믿음과 지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늘 종교와 관련되나요?

-신앙과 종교는 같나요?

-신앙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지친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요?

-신앙을 이해하려면 신앙 언어를 배워야 하나요?

-교회의 전통이 가르치는 것을 모두 믿어야 하나요?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려면 어떠한 규칙이 있어야 하나요?

-신앙은 세상의 기원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의 죽음과 세상 종말에서 어떤 희망을 갖게 하나요?

-신앙을 의심하면 안 되나요?

-은총은 무엇인가요?

-이성과 동의는 어떠한 관련이 있나요? 이 둘은 조화를 이루나요? 아니면 대립되나요?

-신앙은 굴복하는 것일까요? 각자 고유한 신앙을 가질 권리가 있나요?

제5장 성경 -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나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경은 단 번에 쓰였나요?

-성경을 준비 없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나요?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을 유다인과 다르게 읽나요?

-신앙에 관한 성경의 주요 구절을 알려 줄 수 있나요?

제6장 교회 - 모든 이들의 신앙 공동체

-세상에는 왜 교회가 많은가요?

-그리스도교 신앙에 교회가 반드시 있어야 하나요? 교회답다는 것은 무엇이며, 교회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나요?

-교회의 과오가 우리를 신앙과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나요?

제7장 죽음 -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나요?

-영원한 생명이 있나요?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나요?

-세상 마지막 날이나 내 인생 끝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나요?

-죽은 이들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그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맞나요?

- 천국과 지옥은 무엇인가요?

-많은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는 언제 실현되나요?

제8장 실천 -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선포하는 길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삶의 기본자세와 특성은 무엇인가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일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그리스도인이 독자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하느님께서는 내게 귀 기울여 주시나요?

-전례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하느님께서도 전례가 필요하시나요?

-세례는 무엇을 의마하나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나요?

-신심과 영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요?

책에서 다음 주제에 대한 답변 내용을 가지고 왔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이해를 넓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Q.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요?

A.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셧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의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구원 활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전제가 달라졌습니다. 개인의 결단 이전에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역사적인 사랑의 사건이 이미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체험하는지 여부는 그가 하느님과 관계하고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이도 구원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지요. 물론 그 사람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신비를 하느님으로 생각하지는 않아도, 그분께 자신을 개방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이가 하늘나라에 자동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어도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 없어. 어차피 나도 하느님을 따랐던 사람들과 똑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거니까."라고 믿는다면 삶은 진중함을 상실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메시지는 "의식적으로 살아라! 눈을 떠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실패할 수 있다."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오른쪽 죄수에게 낙원을 약속하신 것처럼(루카 23,43 참조) 그분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적 - 과학으로 검증받은 경이로운 진실
파트리크 스발키에로 지음, 이재정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신앙 안에 있으면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제가 듣게 된 기적은 란치아노에서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란치아노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겠습니다.

750년, 란치아노 (147-152페이지)

란치아노는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는 이탈리아 아브루치 지방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8세기 중반까지는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곳이다.

750년경 어느 날, 라틴 전례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바실리오회 수사 신부가 란치아노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는 기도문을 외우고 나서 불현듯 이런 의심을 품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런 의심에 휩싸였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신부의 눈앞에서 동그란 모양의 제병이 살아 있는 살로 변화하고, 성작에 담겨 있던 포도주가 피로 변하한 것이다!

이 신부는 너무 놀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 기적을 감추어야 할까? 아니면 신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까? 겁이 난 그는 주저주저하며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몇 분이 흐른 뒤 그는 성작과 성반을 높이 들어 올려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변화된 살과 피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본 신자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이 기적의 '몸과 피의 형상'은 13세기 중반에 건립된 란치아노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있는 은으로 만든 감실 안에 모셔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923년부터 이 감실 안에는 8세기에 사용하던 제병의 모습을 한 살 조각이 모셔져 있고, 또한 크리스털로 아름답게 제작된 성작에는 마르고 응고된 형태로 그 모양이 '불규칙한' 다섯 개의 핏덩이가 모셔져 있다. 이 살과 피는 그 전에는 네 개의 자물쇠가 채워진 나무 상자 속에 보관해 왔다.

란치아노의 기적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기적의 역사적 시간 순서다. 16세기가 되어서야 이 기적을 언급한 문헌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1566년에 어떤 공증인이 작성한 증서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당 중앙 오른편 제대 위에 안치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란치아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숨겨 두었다.

1574년, 1586년, 1637년, 1770년과 1886년에 교회는 공식 문서들을 통해 이 기적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까지 공식 문서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중세 시대부터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에 란치아노를 교황청이 관리하는 교황령 직속 교구로 지정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수많은 순례자들이 란치아노를 방문하고, 그곳이 교황령 직속 교구로 지정될 수 있었을까?

1636년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새로운 제단을 제작하였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장소에 이런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다.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1751년 10월 14일에 이곳에서 일어난 기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새로운 제대를 '선택받은'장소라고 선언하였다.

175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는 이 기적이 오래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양피지에 희랍어와 라틴어로 쓰인 8세기, 혹은 약간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사본에 이 기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명의 바실리오회 수사들이 이 문서의 원본을 탈취하여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

란치아노의 교구장 페란토니 주교는 이 성유물(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1970년 11월 18일에 처음으로 아레초 병원장이자 해부학과 조직학 교수인 오도아르도 라놀리가 시에나 대학교의 루게로 베르텔리 의학 교수와 공동으로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1971년 3월 4일에 리놀리 교수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이 모습이 놀라웠다.

1) 살은 인간의 '심장 근육 조직'이다.

2) 불그스름한 '액체'를 일반적으로 오류가 거의 없는 크로마토그래피(색층 분석법) 테스트를 하였다. 그 결과 이 '액체'는 인간의 피였으며 혈액형은 AB형이었다.

또한 이 분석 보고서에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 덧붙어져 있다.

"이 살과 피에는 유해를 보존하기 위한 화학적 방부 처리 흔적이 없다. 성유물에서 채취한 피는 정상적인 사람의 피와 동일하였다."

리놀리 교수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어떤 사람이 저지른 행위일 것이라는 전제도 단호히 배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살'에서 볼 수 있듯 나는 오직 인간의 몸 구조를 잘 아는 해부 전문가만이 속이 빈 장기에서 동일한 형태의 얇은 조각을 잘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3년에 세계 보건 기구 WHO는 리놀리 교수가 제출한 분석 결과를 검증하려 하였다. 새로 구성된 위원회는 이 살과 피를 15개월 동안 총 500번에 걸쳐 분석하였다. 이 검증 결과는 1976년에 미국과 스위스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유해를 보존(살균, 방부, 건조 방지)하고 미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유리로 된 유물함에 담아 거의 12세기부터 지금까지 그것(살과 피)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들을 담고 있는 용기는 공기와 빛의 침투를 막지 못할 뿐더러, 식물이나 동물에 기생하는 기생충의 침입도 막지 못한다.

란치아노의 성체는 유례없는 사례이며 과학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 기적은 기적이 일어난 후부터 1300년간 과학자들에게는 완전히 신비로운 사건으로 남아 있고,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남아 있다.


책 '기적의'의 목차를 언급하며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1장. 여러 현상이 나타나는 기적

1) 성유물, 토리노의 수의

2) 발현

3) 놀라운 현상들(성흔, 음식을 먹지 않고 사는 현상(벽곡), 우류 현상, 식량을 늘어나게 하는 기적,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현상)

4) 성인이 직접 체험한 하느님 나라

5) 성인의 무덤에서 일어난 기적

제2장. 예수님과 성체의 기적

1)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2) 성체성사의 기적

(750년 란치아노, 1263년 볼세나, 19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2008년 폴란드의 소쿠카)

제 3장.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

* 기적을 경험한 이들

기적을 행한 사도들

사막의 은수자

세례받을 때 기적을 겪은 클로비스 왕

파리의 성녀 제노베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

헬프파의 제르트루다 성녀

스웨덴의 비르지타 성녀

잔 다르크

요안나 드 발루아 성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블레즈 파스칼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

알폰소 마리아 데 라구오리 성인

베니딕토 요셉 라브로 성인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 복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