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퇴치 운동을 하기 위해 윤봉길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함께
야학을 시작합니다.
이후 윤봉길의 명성은 인근 마을로 퍼져 나갔고, 여러 사람들의 참여도가 늘어나
1928년 '부흥원'이라는 이름의 회당을 건립하는 등
야학과 농촌 계몽 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갔어요.
야학으로 시작된 윤봉길은 독립운동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됩니다.
이후 윤봉길은 나라의 독립을 이룰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겨두고
만주로 가게 됩니다.
이봉창의 1·8 도쿄 의거로 윤봉길은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며 김구를 만나게 됩니다.
윤봉길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행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도시락과 물통 형태의 폭탄을 마련합니다.
윤봉길의 거사는 성공하였습니다.
단상 위에 있던 일본인 고위 관료들은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하였고
윤봉길의 가장 큰 표적이었던 사라카와 대장은 큰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답니다.
이 거사는 한국, 일본,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오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끌지 못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의 거사로 인해 세계의 시선을 모을 수가 있었다고 해요.
윤봉길은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당하며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지만
그로 인해 대한 제국의 독립운동이 불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