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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서평_치자나무_아야세 마루_현대문학
아름다운 로맨스의 선율이 느껴졌던, 그러나 작가가 그리는 독특한 세계관이 매력적이었다. 오묘하면서도 잔잔한 전개 그리고 심리적 긴장감은 더욱더 <치자나무>에 몰입되었다. 소설의 규칙성이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된 걸까, 싶었다. 그렇다면 개연성을 따지지 않고 예술 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린 다면 어떨까. 아니면 작가만의 개성이라고 해둔다면. 그 어떤 이야기라도 독자 스스로가 이해해버리면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집중되어 버리는 묘함이 있었다. 해괴망측한. 그리고 자연스레 남녀간의 불륜의 결말을 얘기하는 중인데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별의 댓가로 여자가 원한 게 돈이 아니라 남자의 팔이었다니. 그런데 남자의 반응은 더 기가막히다.
나는'제 정신인가? 팔을 달라니, 이 무슨 그로그테스크함인가.' 하며 당황했다. 근데 진짜로 팔을 준다. 어떻게? 그냥 몸에서 떼어 준다.
소설의 세계에선 그게 가능한 걸까, 싶은. 독자는 그저 읽으라는 건가.
팔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뚜둑 하고 뼈가 분리되면 돌려서 뽑아낸다. 이 때 독자들은 고통스런 비명과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오겠지, 하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작가 의도대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주입시키는 것이 독특했다.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하고 싶다. 그만큼 이 소설은 특이하고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뭐랄까, 클래식 음악으로 치자면 조성음악이 깨어져 버린 자유 형식의 무조 음악이라고 하면 될까, 아무튼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팔을 뽑아내는 건 공포스럽다. 그러나 마치 선물을 주고 받는 듯한 전개는 자연스러웠다. 이 두가지 심리적인 대비가 굉장했다. 결국 그 팔은 여자에겐 사랑했던 남자의 최후의 흔적이자 추억을 간직한 존재였다. 괴기스럽게도 그 팔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성이 있었다. 남자의 습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여자에게 남자의 숨결과도 같은 사랑을 주었다. 보고, 듣고, 행동하는 팔.
그걸 유리 화병에 담아 물을 채워 놓고 담그면 신선함을 유지했다.
<치자나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건 팔이라는 존재였다. 남자의 팔을 찾으러 오는 부인. 다툼 끝에 거래를 하는데 남편의 팔을 돌려주고 부인의 팔을 받는다. 거기서 또 느껴지는 부인에 대한 남편의 마음을 또 그 팔을 통해 느낀다.
공원에서 마주친 치자나무. 그리고 그곳까지 여자를 이끈 부인의 팔. 그것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