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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언어학 강의 ㅣ 철학의 정원 5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김현권 옮김 / 그린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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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의미를 전달받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문학이나 예술 비평 그리고 철학의 경우는 다루어지는 언어가 무척이나 추상적이며 지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심지어는 구성되는 단어나 문구가 살아있거나 실재하는 실체처럼 느끼거나 심지어 확신을 가지기도 하는 상황을 자신도 모르게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특히 철학의 경우 언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이런 언어로 집을 지은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로인한 한계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묻고 답하는 시간들을 가지는 것 같다. 철학적 관점에서 언어에 접근한 사람 중 제일 영향력이 큰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본다면 언어 그 자체의 관점에서 접근한 사람 중에는 페르디낭 소쉬르이 그 선구자이자 아직도 영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강의를 제자들이 취합하여 만든 일종의 강의노트가 “일반언어학 강의”이다. 이 책은 언어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를 태동시킨 책이기도 하다. 소쉬르의 용어 중 제일 중요한 용어는 아마 랑그, 빠롤, 시니피앙, 시니피에 정도일 것이다. 놀랍게도 나 역시 이 용어를 40년도 더 전에 고교 1학년 국어 참고서에서 접해 본 적이 있다.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던 경험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 용어를 확립한 저자의 책을 읽게 되어 감개 역시 무량하였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의 토대는 일단 언어의 자의성이다. 모든 단어나 문법구조 등은 자의적이고 각각이 기호적인 것이라 단독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문장구조안의 배치나 차이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철저히 자의적인 부분이 사회에서 상호소통을 통해 사회성을 획득해야만 언어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자의성과 사회성이 결합되어야만 최소한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가 되고 통용이 된다는 것이 그 기본원리이다.

단어가 기호로 존재하는 것을 시니피앙(기표)이라고 하고 그 대응하는 의미를 시니피에(기의)라고 하는데 이 결합자체가 철저히 자의적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를 한글로 사과, 애플, 링고 등등 어느 것이로나 결합해서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사과(기표)라는 단어로 그 의미(시니피에)를 표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소쉬르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같은 역사적 시기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변화나 규칙들(공시언어학)과 과거로부터 지금 이 시기까지 지나오면서 발생, 변화하는 언어적 변화등(통시언어학)을 구분하면서 이러한 통시적, 공시적 언어영역들 역시 자의성을 그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성을 통해 확립되어 가는 과정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해간다. 공시 언어학에서는 통합관계와 연합관계를 통해서 통시언어학에서는 음성진화와 유추 등을 통해서 그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통합관계는 단어의 형성에서도 사용되고 문장에서도 이용된다.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라는 문장속에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형태로 나열되면서 발화와 의미를 획득한다. 심지어 “나는”은 “나””는”으로 각각의 발음을 가능한 최소단위로 또 나누어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통합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단어를 구성하지도 문장을 구성하지도 못하게 된다. 여기서 이 문장을 듣거나 볼 때 우리는 “가르침”이라는 단어를 목도하면서 “배움” “교육” 등의 단어와의 연관성이나 교체가능성을 검토하게 되는데(물론 이런 의미적인 것 말고 어근이 같은 단어 등도 고려대상이 된다) 이를 연합관계라고 한다. 소위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형태론과 통사론은 통합관계를 다루게 되고 어휘론은 연합관계를 다루게 되는데 사실상 이 두 가지는 같이 가기 때문에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음성변화는 음성교체, 모음교체 등을 통해 진행되며 유추는 일종의 모방으로 음성교체, 모음교체 등으로 변화한 다른 단어들을 보고 그 규칙성에 맞추어서 유추해서 바꾸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언어의 특징과 규칙을 과학적 탐구의 결과들로 정립해 나간 저서로 읽다가 보면 정교한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느낌마저 주는 역저임에 틀림없다. 예시로 든 것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라 이 부분은 좀 어려웠는데 라틴어나 독일어 예시들은 그래도 이해하기가 나은 정도이다. 하지만 대부분 예시를 꼼꼼히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게 번역이 되어있어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언어의 인종적 차이나 어족과 민족적 차이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는 부분도 펼쳐 나감으로써 언어는 언어일뿐 인종적, 지리적, 민족적 우월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읽다 보면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단어들은 자의적으로 구성된 기호이지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문장 역시 통합적 관계에서 순서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이렇게 생성된 문장 역시 핵심단어들이 연합적 관계에 의해 대치되거나 변화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적 행위 자체가 상당히 불완전한 토대위에 서있음을 알게 되고 이런 언어적 행위를 통해 우리가 과연 영원불멸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건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공부해보면 결국 통합관계와 연합관계가 제일 중요한 테마인데 이건 한 단어, 한 문장안에서 각각의 음소나 단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그로 인해 언어적 기능을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에 각 개별 요소들이 의미와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런 관계들의 형식 – 구조-가 중요함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소쉬르가 프랑스 구조주의의 선구자가 되고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인류학에서 그 방법론을 가져옴으로써 구조주의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소쉬르는 중요한 이론가이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언어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 확립되어 있는 촘촘한 언어 내부의 관계들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정의를 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었고, 오늘날 이런 학문의 방법은 거의 대부분의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의 기본이 되어있는 것 같다. 물론 구조만 분석되었다고 우리가 그 구조의 개체들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응용할 수는 없지만 구조분석이 되지 않으면 대단히 허약한 기반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형태로 마치 일대일 대응이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라캉을 통해서도 배우고 비트겐슈타인을 통해서도 배웠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기표와 기의가 대응한다고 가정하고 진행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고 특정 상황이나 추상적 논의들로 들어갈 때 이 대응관계가 의문시되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도 전기 철학에서는 소쉬르에 가까웠다면 후기철학에서는 언어게임으로 전화하여 상황과 맥락 그리고 언어사용행위의 결과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설파한다. 지금 읽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 부분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음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효용과 그 한계가 무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분간 공부를 좀더 해보아야 겠다. 인지과학적 관점이긴 하지만 언어의 창조와 진화에 대한 책 “진화하는 언어” 를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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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곽강제 옮김 / 서광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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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전기저작인 “논리철학 논고 (논리철학론)”을 일독하였다. 하이데거에 이르니 현란한 언어적 기원추적과 의미추적 그리고 적절한 의미부여를 위한 변형 등이 이루어지면서 마치 이러한 언어적인 처리방식 자체가 진리성을 담보로 하는 듯한 논지를 펼치는 듯하여 철학분야에서 언어가 가지는 역할과 그 한계를 한번은 제대로 따져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된 책이 이 책이다. 사실 오늘 날 모든 학문은 언어로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특히나 문자언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언어가 가지는 기능과 효용 그리고 한계를 진지하게 고찰을 해보아야 특정 학문의 특정 저자가 논하고 있는 그 내용이 적확한 것인지, 독자 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 쪽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가 펼쳐나가는 논리의 오류인지 그 논리를 담아내고 있는 언어적 문제인지 아니면 한계로 인해서 생기는 오류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았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고교 1학년때 수학 집합론을 배우면서 명제의 진리치들을 공부할 때 흥미가 생겨서 명제들의 진리치들을 가지고 논증을 하는 작업을 해본적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옳다고 널리 인정되어지는 명제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 증명하고자 하는 명제를 적용시켜보면(역시 옳다는 가설을 깔고 있는 상태로) 거의 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율배반이 적용되는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적으로 이야기하면 항진명제로 진리치를 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되는 형편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논리적 이유까지는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의 진리치를 객관적으로 구할 수 없다 라는 직관적인 판단이 서서 그 이후엔 그런 장난(?)은 그만두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그 당시 프레게와 럿셀로 시작된 모든 언설을 명제화 시키고 그 명제의 진리치를 구하면 그 진리치의 조합으로 모든 언설과 그 언설들의 복합체들마저도 진리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더욱 정밀화시키고 프레게와 럿셀이 노출했던 약점들을 보완시켜 “일반명제의 법칙”을 구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첫 시작점에서 명제를 구성하는 제일 기본 단위인 이름이 반드시 “대상”을 지시해야한다고 지정한다는 점이다. “대상”은 소위 형식적 개념이라서 수학으로 치면 일종의 변수에 해당하므로 대상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상 자리에 세계내에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어야 한다. 특정한 것이 지정되지 않은 상태인 명제는 일종의 명제함수가 되는 것이고 항상 변수의 자리에 세계내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기를 기다리는 상태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다고 만들어진 명제는 명제 자체로는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그 명제는 변수자리에 세계내의 것이 대입되어 진리치를 따지게 되는 순간부터 현실에서 작동하고 진리치를 가지고 명제자체의 진리치를 가지고 또한 명제가 결합되었을 때 그런 복합명제의 진리치를 만들어 내게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태까지의 철학적 명제들은 변수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수가 통용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런 철학적 명제들의 조합으로 거대 철학담론의 논리적 진리성을 확보한다고 여겨왔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안의 실재하는 뭔가를 지칭하는 이름들로 구성되는 명제들로 일반법칙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방안을 제시하였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명제들의 진리치들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들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감성으로 시공간 속에서 파악되어지는 부분까지는 이런 진리함수의 세계에서 언어의 세계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나 순수이성의 영역과 같이 추상화, 일반화의 과정을 가져 개념화되는 부분을 명제의 변수로 넣을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대부분은 헛소리이고 윤리나 미학의 영역은 언어로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라는 통찰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는 우리가 만들어 낸 (순수이성에 의해) 개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논변하지만 그 개념을 현실에서 펼쳐나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개념들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막지는 않았고 특히나 윤리적 측면에서의 개념들은 실천이성의 힘으로 펼쳐나가는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다. 그에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들도 언어적 방법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없는 부분이므로 침묵하라는 권유만 할 뿐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윤리나 미학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다거나 완전한 헛소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언어로 포착될 수 없고, 언어로 모든 논의를 풀어가는 철학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모든 형이상학적 철학적 논의들 전체가 잘못된 전제 – 언어로 쌓아올릴 수 있는 영역이라는-위에 서있는 것이므로 일종의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역사를 그 언어적 기원으로부터 유추하고 변이되는 양상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그런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는 완벽한 헛소리라고 볼 수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제기한 실존적 물음과 그 답의 추구는 비록 세계에 실재하는 것을 지시하는 대상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유효하고 단지 그가 제시한 답이라는 것 역시 어떻게 보면 괄호를 쳐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시된 답이라는 것을 현실에 맞춰가며 진리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지면서 확인된 진리치에 한하여 유효한 명제, 의미있는 명제의 카테고리 속에 두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언어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로 한계너머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특징인지라 어떻게 보면 칸트의 겸손한 결론과 – 실천이성의 실현으로 목적의 왕국을 이루자라는 – 하이데거의 실존적 결단과 같은 결론이 인간이 봉착한 막다른 길에 대한 숨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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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의 근본문제들 - 마르틴 하이데거 전집 제24권 ㅣ 마르틴 하이데거 전집 24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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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근본문제”를 일독하였다. 이 책은 하이데거 전기사상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에서 원래 저술하려고 하였으나 다 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강의록이었으나 결국은 미완성된 상태로 출간된 책이다. 특히나 이 책은 강의록의 형태라서 존재와 시간에 비해 하이데거의 생각의 중심과 펼쳐짐을 파악하기 쉬운 부분이 있고 첫 부분에서 현상학에 대한 간단한 요약과 그 뒤를 이은 일종의 존재론의 철학사를 통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펼쳐나갔던 논리의 핵심을 다소 쉽게 복습할 수 있다는 점은 강점이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상 이 책의 첫째 부분에서는 일종의 존재론의 철학사를 기술해 나간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의 개념이 훗설의 현상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철학의 전통으로부터 중세시대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논의되어온 부족한(은폐되어온) 존재개념을 자신의 현존재 분석에 의한 기초존재론으로 탈은폐시키면서 완성하고자 함을 보이기 위해 이 책의 거의 절반에 걸쳐 아주 자세히 분석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존재론을 펼쳐나간다. 결국 책을 곰곰히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것은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방법으로 파악해낸 자신의 “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존재론들이 “현상학적 존재론”에 비해 모자란 점들을 파헤쳐나가는 작업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각 시대별 존재론의 부족한 양상을 각 존재론에 내재한 논리나 구조의 부족이나 결함으로 인해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론이 완성되어져 온 것처럼 이야기 하나 사실은 현상학적 작업의 결과 나온 존재론의 틀속에서 각 시대별 존재론을 비교분석하여 해체해 나가는 정교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뭔가 솔직한 편은 아닌듯한 인상이 강하게 받았다.

두번째 부분이 사실상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존재와 시간에서 멈춘 다음 부분인 시간과 존재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사실상 하이데거는 훗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사람자체에 맞추고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밝혀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훗설은 현상학적 환원이후 밝혀지는 것이 “현상학적 실체” – 소위 의식내부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반면 하이데거는 단순히 의식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 실재 자체이며 의식과 실재는 애시당초 하나로 묶여있는 것 –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이점에서는 훗설은 데카르트-칸트계열을 따른다고 볼 수 있고 하이데거는 셸링-헤겔 계열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소위 정신적인 것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라고 하는 테제는 독일 낭만주의를 관통하는 부분이며 사실상 독특한 부분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생각은 셸링의 정신과 자연의 상호교통과 치환가능성과도 다르고 헤겔의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에 의하여 대상(물질)을 관통하여 그 본질을 꿰뚫고 귀환하여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생각과도 다르다. 칸트나 훗설의 의식철학처럼 물자체나 대상자체에 궁극적으로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보다는 더 나아가고 헤겔처럼 물자체나 대상자체와 합일하여 그 본질을 획득하여 귀환한다는 생각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그 중간 어디에 머물러 있다. 하이데거의 지평개념등을 고려해보면 현상학적 환원과정이 변증법적으로 수행되어 가면서 존재를 확장해나간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바탕이다고 생각이 든다.  의식의 지향이 그 시발점이 되지만 이미 주어진 세계와 이미 하나의 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것이 사실상 “존재”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는 의식-실재의 커플링이 기본전제가 되어있는 것이 제일 특징이다. 마치 빛의 파동-입자의 이중성격이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과 같은 묘한 부분이 있어서 아주 매력적이고 쉽게 반박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현상학적 근본개념을 읽으면서 든 가장 큰 기쁨은 이 사람의 책은 철학이 드디어 논리와 말의 잔치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삶의 지침을 주는 그런 철학의 발걸음을 뗀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가 진행한 현존재 분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세상에 나와있고 반응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제대로 살고는 있는가?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런 내용을 철학이라는 학문안에서 철학적 용어로 우리를 설득하는 사람이 하이데거이다. 그런데 이 두 책을 곰곰히 읽어보면 과연 하이데거의 논의가 엄밀한 철학적 논증을 거쳤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의 평가는 하이데거가 시도한 것은 철학이었고 또한 자신도 자신의 책이 철학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철학적 인간학”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는 결국 “인간”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추구한 것은 현존재를 분석하여 현존재가 구성하는 존재론을 파악한 뒤 모든 것에 적용되는 일반존재론을 도출해 나가거나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현상학의 근본문제는 현존재의 존재론을 전개하지만 현존재의 일반성을 여전히 도출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끝이 난다. 현존재의 일반성을 이끌어내는 마지막 단계로 설정한 것이 “시간성”인데 하이데거는 이 시간성을 유일한 가능조건으로 설정해버림으로써 반론가능한 논리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영역에 시간을 순차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미래의 뭔가를 꿈꾸면서 과거부터 해오면서 축적된 것을 가지고 현재를 미래-과거가 함께 투영되어 살아간다. 이 경우 인간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과거-현재-미래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이런 시간의 양상이 인가에게 나타남을 철학의 분야에서 이야기한 철학자가 없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는 탁월하다. 이렇게 현존재(인간)에게 나타나는 시간의 양상을 시간성이라고 한다. 분명 이 부분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그런데 이 시간성이 유일한 존재의 가능조건이 된다면 현존재가 시간성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면 현존재의 존재가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시간성을 살아내는 사람은 일단 기본적인 인간의 생리학적 기능이 정상이어야 하고, 진정한 시간성을 살아나가려면 본래적 자신을 파악하고 살아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래적 자아란 일상성에 묻히지 않고 시간성을 항상 몸속에 체득하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진정한 자신에 투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만일 선천적 중증 정신지체 장애환자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기본적인 뇌기능이 이러한 시간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성의 영향을 받고는 있으나 활용도 못하고 묻혀있는 상황이고 심지어는 평생동안 그럴 수도 있다. 시간성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유일조건이 되는 순간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자의 예의 경우 일단 실재적으로는 존재하나 하이데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의 “존재”는 실증적인 분야의 존재를 포함하는 상위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모순되게 된다. 전자와 후자의 예 모두의 경우 하이데거식의 논의가 일방적으로 흐르면 나찌즘적인 양상으로 갈 수 있다. 시간성이 작동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란 나찌즘적으로 보면 “사람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경우 그 존재가 인정되지 못하면 말살하고자하는 의도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가 나찌즘과 연관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이런 위험성이 내재되어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했던 자신만의 존재론이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상학적 존재론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이유와 그 한계를 현상학적 근본문제를 읽으면서 알개되었다. 하이데거는 지나치게 신비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뜯어서 읽어보면 그 한계와 단점은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시간성을 현존재 가능조건의 유일조건으로 내건 것은 아마도 일반 존재론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에 시도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성을 이렇게 해서 일반 존재론의 기능조건으로 확장하는 것이 포기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첫째는 현존재 유일 가능조건이 만족되지 못함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둘째는 현존재 존재론 자체가 현상학적 방법의 선상에서 전개된 것인 데 이런 존재론의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 현상학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아이디어로 현존재를 제외한 나머지 존재들까지 확장된 일반존재론으로 넘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되어서가 아닐까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은 철학적 인간론으로서 받아들이며 실제 살아가는데 응용하면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그러나 철학으로서 받아들이면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 부작용도 실제 역사상에서 확인된 바가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딱 “존재와 시간”을 읽되 그 책에서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드러내는 야심 – 현존재 분석을 통한 현존재 존재론의 파악과 일반 존재론의 완성-에 대해선 어느정도 무시하고 현존재 분석에서 드러나는 “사람이 세상을 파악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방법과 그 특징 그리고 지나친 일상성에서 탈출하여 본래적 자신을 찾아나가는 방법으로서의 “기투”를 파악하고 이러한 기투는 과거-현재-미래가 역동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 정도를 알게된다면 복잡다단한 세상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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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26
에드문트 후설 지음, 이종훈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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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설의 후기 마지막 주저작인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의 일독을 마쳤다. 훗설이 전체적으로 자신의 현상학을 조망하는 형식을 이루고 과거 철학들의 특징과 비교를 추적관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선험적 현상학이 어떻게 과거의 철학을 품에 안고 발전해 나간 학문인가를 차분히 설명해 나가는 형태이다. "데카르트적 성찰"이 현상학의 작동기전과 그 핵심인 선험적 자아의 정체와 선험적 현상학이 성취해내는 결과가 우리가 평소 파악하고 있는 세상과 어떻게 달라져서 그 의미가 획득되는가를 밝히는데 핵심이 있다면, 이 책은 미리 주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선험적 현상학을 이용하여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본래적인 세상을 파악해내는가를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해 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면에서 "성찰"과 "위기"는 상호 보완적이다.. 어떻게 보면 "위기"를 먼저 일독하고 "성찰"을 공부하는 것이 좀더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찰"은 철학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군더더기가 없고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에 대한 탐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위기"는 현실적 토대에서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때문에 일견 좀더 이해하기 쉬운 점이 있으나 뭔가 번잡하고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에 대한 논의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위기"자체에 대한 큰 논의는 필요없을 듯 하다. "성찰"에서는 좀 흐릿했던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논의가 좀더 명확히 정리되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훗설의 현상학의 제자들이 결국은 다 버리고 떠난 선험적 자아에 대한 논의는 원론적인 부분에 머무르고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제자들이 현상학적 방법론인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만 받아들인 이유도 사실 선험적 자아의 정체성이 모호하기때문이다. 하지만 훗설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자신의 제자가 결국 현상학의 핵심인 선험적 자아에 대한 논의는 다 팽개치고 결국은 방법론적인 현상학의 전개속에서 섣부른 비본래적인 현상파악과 "존재"에만 머물러고 있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선험적 자아"의 파악과 정체는 사실 훗설 현상학에서는 핵심일 수 밖에 없다...
훗설의 책을 읽어보면 훗설의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포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모든 철학적 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져오되 "선험적 자아"의 필터링을 통한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물로 재탄생해야함을 강조할 뿐이다. 결국 현상학적 환원이란게 단순히 편견을 버리거나 통상적인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제일 순순한 상태의 주관적 상태 - 인식을 제일 순수하게 진행할 수 있는 레벨의 자아 단계 - 에서 획득해지는 대상의 의미, 세계의 의미 그리고 이런 개개인의 선험적 자아들이 확득한 의미들의 총합이자 공통합이 만들어내는 "상호주관적 선험성"이 궁극적 획득물이기에 이 선험적 자아에 대한 이해와 인정없이는 "훗설"의 현상학은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훗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선험적 자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의식하는 자아에 속하는 것이다. 단지 그걸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그 단계로 내려가기위해서는 끊임없는 판단중지를 통해 세상을 살면서 덧붙여진 많은 자아의 껍질들을 다 떼어내고 순수자아의 단계로 내려가서 대상과 세상을 인지, 인식해나가야 진정한 현상학적 환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또한 초기에는 형상적 환원으로 모든 대상과 세계를 정의하고 형태짓는 잡다한 것을 다 떼어내고 순수한 형상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통해 대상과 세계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 작업이후 이러한 대상과 세계가 나에게 진정 다가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대상과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게되는데 이것이 "현상학적 환원"의 최종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들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에 집단이 영속하는 동안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거대하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걸 훗설은 "객관"이라고 한다. 자연과학적 객관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꼭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두가지가 생긴다..
첫째는 과연 훗설이 이야기하는 순수자아에게 대상과 세계를 순수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순수자아가 대상과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직관"인데 이런 방식이 과연 받아들일만한 것인가? 혹은 심지어 이런 순수자아라는 것이 우리가 사고실험을 통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둘째는 "성찰"에서 오이겐 핑크가 고찰한 것인데 순수한 자아가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그걸 현상학적 환원이후 우리가 대상과 세계에 적용할 때는 다시 지금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언어도단"의 단계의 이르고 다시 언어의 세계로 돌아온다면 같은 언어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지는 일종의 "비유"가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었을때 상호주관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면 어떻게 상호소통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상호주관적인 공통점으로 합의된 부분이 "객관"이 되는 훗설의 논의는 여기서 큰 고비를 맞게 된다...
한편으론 훗설의 고뇌가 이해가 된다. 실제적인 객관적 팩트만으로 인간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이 파악하고 판단하여 의미부여한 것으로 대상을 정의하고 세계를 정의하고 소통한다. 물론 객관적인 사물과 세계들이 중요하나 여기에 제대로 된 의미부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날 과학의 시대와 도구주의적 시대에서는 이런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식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의미부여하는 주관적 과정의 철학적 논의와 진리성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훗설의 의도였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철학이 개똥철학을 넘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속에 실제로 작동하는 양식을 보여주는 친절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시도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리문제를 다루는 "철학"이 되면 또 다르다. 훗설의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철학적 논의는 사실 훗설 자신도 그 제자들도 아직 우리에게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의미부여의 주체에 대한 논의와 그를 통한 본래적/비본래적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 부분에서 현상학은 탁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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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 세계-유한성-고독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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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현상학의 근본문제들˝도 북펀드해주면 좋겠어요.. 이기상 교수님 번역이었으니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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