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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ㅣ 대우고전총서 4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승종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평점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이어서 그의 마지막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탐구”를
완독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라는 병에 대한 치료는 사유와 삶의 양식이 변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철학이 가지는 엉터리 명제들이나 개념들은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한 그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을 제외한 부분에서 그 의미를 확정하기위해 진리함수적인
확인을 통해 검증해나가야 한다는 논지를 설파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걸 깨치게되면 논리철학논고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을 더 이상 참고할 수 없음을 알리고 이야기를 마치게된다.
사실 진리함수적 접근은 대단히 객관적인 접근이며 이런 접근이 가능한 부분과 아닌 부분은 극명해진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사용하는 많은 말과 문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사상적 전회에 가까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문자가 실제 상황에서 어떤 맥락선상에서 사용되며 그 사용을 통해서 그 말과 문자가
의미를 획득한다는 이야기를 무려 66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내용에서 끊임없는 자기질문과 답변 그리고
사고의 흐름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사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출판을 목적으로 저술한 책이 아니라
일종의 “노트”같은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생각의 흐름이나
주제의 흐름에 따라 계속 쓰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답하고 의문을 가지고 하는 책이라 처음에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600페이지 넘게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사고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언어를 부정확하게 통용해왔는지를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런데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분야에서 언어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며 의미를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재미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이 책을 구상하고 저술했지만 이 책에서는 심리철학 일부를 제외하곤 사실상 감각적인 표현이나 믿음이나
기대와 같은 다소 추상적인 언어를 다룬 것을 제외하곤 철학적 용어나 개념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언어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용함으로써 비로서 획득되어지는 것이기에 특정 단어나 어휘가 특정 의미로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인문학에서는 그 언어적 적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시점, 그 책의 안에서라도
저자가 의미하는 것과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에
대해선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가 더 이상 전개 되지않고 종료된다. 아마 불가능한 일에는 언급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여기서 부터는 언어학의 영역으로 접어들 것 같다. 소쉬르는 기호는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기호체계내부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결정된다고 본다. “사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를 가리킬 수 있지만 사회내부에서 약속만 된다면 배나 복숭아를 가르킨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과, 배,
복숭아 등등이 계속 지시되어 있는 일련의 자의성에 근거한 사회성이 확보되어버리면 이것들은 과일이라는 체계 안에서 각각의 차이를 가지고
지시하게 되므로 어느정도 의미가 고정되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라는 단어는 아들이 엄마에게 엄마 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외치면 사과를 건네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아들이 어려서 말을 배우는 단계라면 사과를 지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이 대단히 복합적인 양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할 때 최소한 한국내부에 있는 사람들
안 에서라도 동일한 의미를 획득하는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절차적)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등등
많은 함의를 가질 것이다. 심지어는 한 분파안에서도 또 갈린 의미들을 생성해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획득하는가? 결국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결의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연륜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나 사회활동가들의 말을 보지 않고 그가 살아온 행동의 궤적과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성향을 본다. 이런 것을 보지 않고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존재”라는
용어는 여러 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철학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말을 사용하는 철학자가 속해 있는 시대가 함의하는 내용과 더불어 그 철학자가 과거의 단어로부터 차이를 만들어 형성한 부분까지 고려해야하며 심지어는
그런 용어가 실제의 문장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어지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사용되면서 그 의미를 획득하는지 까지를 보아야
최소한 그 시점에서의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제일 근본적인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에 제기했던 이야기 –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비록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의미를 획득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한계에 대한 인식만은 항상 뇌리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 책은 뭘 읽어 볼까 생각 중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내려가기보다는 일단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고
설파한 라캉의 에크리와 텍스트의 내부에서 텍스트 자체의 논리로 해체하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공부하면서 현대철학을 계속 더듬어 가볼까 한다. 기본적으로 “현상학”, “정신분석학” 이 두 분야는 자칫하면 종교와 신화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좋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저서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 임상에 기본을 둔 책이고 자신도 임상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임상적 치료 부분에서는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욕망의
철학과 맞물려 신비화되어 있는 부분도 있어서 원저를 읽으면서 그 진위를 한번 확인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