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곽강제 옮김 / 서광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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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전기저작인 논리철학 논고 (논리철학론)”을 일독하였다. 하이데거에 이르니 현란한 언어적 기원추적과 의미추적 그리고 적절한 의미부여를 위한 변형 등이 이루어지면서 마치 이러한 언어적인 처리방식 자체가 진리성을 담보로 하는 듯한 논지를 펼치는 듯하여 철학분야에서 언어가 가지는 역할과 그 한계를 한번은 제대로 따져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된 책이 이 책이다. 사실 오늘 날 모든 학문은 언어로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특히나 문자언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언어가 가지는 기능과 효용 그리고 한계를 진지하게 고찰을 해보아야 특정 학문의 특정 저자가 논하고 있는 그 내용이 적확한 것인지, 독자 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 쪽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가 펼쳐나가는 논리의 오류인지 그 논리를 담아내고 있는 언어적 문제인지 아니면 한계로 인해서 생기는 오류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았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고교 1학년때 수학 집합론을 배우면서 명제의 진리치들을 공부할 때 흥미가 생겨서 명제들의 진리치들을 가지고 논증을 하는 작업을 해본적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옳다고 널리 인정되어지는 명제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 증명하고자 하는 명제를 적용시켜보면(역시 옳다는 가설을 깔고 있는 상태로) 거의 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율배반이 적용되는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적으로 이야기하면 항진명제로 진리치를 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되는 형편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논리적 이유까지는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의 진리치를 객관적으로 구할 수 없다 라는 직관적인 판단이 서서 그 이후엔 그런 장난(?)은 그만두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그 당시 프레게와 럿셀로 시작된 모든 언설을 명제화 시키고 그 명제의 진리치를 구하면 그 진리치의 조합으로 모든 언설과 그 언설들의 복합체들마저도 진리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더욱 정밀화시키고 프레게와 럿셀이 노출했던 약점들을 보완시켜 일반명제의 법칙을 구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첫 시작점에서 명제를 구성하는 제일 기본 단위인 이름이 반드시 대상을 지시해야한다고 지정한다는 점이다. “대상은 소위 형식적 개념이라서 수학으로 치면 일종의 변수에 해당하므로 대상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상 자리에 세계내에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어야 한다. 특정한 것이 지정되지 않은 상태인 명제는 일종의 명제함수가 되는 것이고 항상 변수의 자리에 세계내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기를 기다리는 상태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다고 만들어진 명제는 명제 자체로는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그 명제는 변수자리에 세계내의 것이 대입되어 진리치를 따지게 되는 순간부터 현실에서 작동하고 진리치를 가지고 명제자체의 진리치를 가지고 또한 명제가 결합되었을 때 그런 복합명제의 진리치를 만들어 내게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태까지의 철학적 명제들은 변수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수가 통용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런 철학적 명제들의 조합으로 거대 철학담론의 논리적 진리성을 확보한다고 여겨왔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안의 실재하는 뭔가를 지칭하는 이름들로 구성되는 명제들로 일반법칙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방안을 제시하였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명제들의 진리치들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들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감성으로 시공간 속에서 파악되어지는 부분까지는 이런 진리함수의 세계에서 언어의 세계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나 순수이성의 영역과 같이 추상화, 일반화의 과정을 가져 개념화되는 부분을 명제의 변수로 넣을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대부분은 헛소리이고 윤리나 미학의 영역은 언어로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라는 통찰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는 우리가 만들어 낸 (순수이성에 의해) 개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논변하지만 그 개념을 현실에서 펼쳐나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개념들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막지는 않았고 특히나 윤리적 측면에서의 개념들은 실천이성의 힘으로 펼쳐나가는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다. 그에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들도 언어적 방법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없는 부분이므로 침묵하라는 권유만 할 뿐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윤리나 미학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다거나 완전한 헛소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언어로 포착될 수 없고, 언어로 모든 논의를 풀어가는 철학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모든 형이상학적 철학적 논의들 전체가 잘못된 전제 언어로 쌓아올릴 수 있는 영역이라는-위에 서있는 것이므로 일종의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역사를 그 언어적 기원으로부터 유추하고 변이되는 양상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그런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는 완벽한 헛소리라고 볼 수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제기한 실존적 물음과 그 답의 추구는 비록 세계에 실재하는 것을 지시하는 대상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유효하고 단지 그가 제시한 답이라는 것 역시 어떻게 보면 괄호를 쳐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시된 답이라는 것을 현실에 맞춰가며 진리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지면서 확인된 진리치에 한하여 유효한 명제, 의미있는 명제의 카테고리 속에 두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언어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로 한계너머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특징인지라 어떻게 보면 칸트의 겸손한 결론과 실천이성의 실현으로 목적의 왕국을 이루자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적 결단과 같은 결론이 인간이 봉착한 막다른 길에 대한 숨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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