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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 탄생 - 한 조각씩 꺼내 보는, 14가지 약 이야기
김효정 지음 / 반니출판 / 2026년 10월
평점 :
표지에 적힌 ‘실험실에서 약국까지, 세상을 바꾼 14가지 약의 역사’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약에는 과연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 두통이 생기면 찾는 타이레놀부터 감염병 치료에 혁명을 일으킨 항생제,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비만 치료제 위고비까지 약은 인류의 삶을 변화시켜 온 중요한 과학적 성과물이다. 하지만 정작 약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되었으며 우리 몸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 탄생 과정에는 과학적 발견뿐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 연구자들의 집념,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약의 탄생>은 이처럼 익숙하지만 잘 알지 못했던 의약품의 세계를 역사와 과학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낸다.
약학 박사이자 단백질 구조생물학 연구자인 저자는 제약회사 영업 현장과 병원 약국을 거쳐 대학 연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의약품의 개발 과정과 작용 원리는 물론 그 이면에 가려진 실패와 논쟁, 특허와 마케팅의 영향까지 폭넓게 조명한다. ‘고통과 감각’, ‘생존과 공포’, ‘욕망과 균형’이라는 세 가지 주제 아래 펼쳐지는 14가지 이야기는 인류가 질병과 고통에 맞서 온 과정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해 온 역사를 함께 보여 준다. 특히 저자가 직접 그린 19컷의 과학 도판과 다양한 역사적 사료는 복잡한 약학 지식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고 각 장에 마련된 ‘Lab box’는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까지 전하고 있다. 단순히 의약품의 효능이나 발견의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적 성과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선택까지 함께 살펴본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오늘날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학자가 된 저자에게도 약학은 처음부터 친숙한 학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과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한 저자는 낯선 화학 용어와 영어 교재 앞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다른 학생들은 쉽게 이해하는 듯한 수업에서 질문조차 망설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에서 마주한 한 장의 흑백사진이 그의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로 삼았던 X선 회절 사진이었다. 얼핏 흐릿한 점과 선으로만 보이는 사진에서 어떻게 DNA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저자는 그 원리를 이해하려면 대학원에서 더 공부해야 한다는 답을 듣는다. 막막함과 호기심이 교차하던 시절, 교수님이 건넨 "이거 효정이도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말은 새로운 도전을 이어갈 용기가 되었다. 그렇게 과학의 세계에 한 걸음씩 다가간 저자는 이제 구조생물학자로서 학생들에게 같은 사진을 보여 주며 자신이 받았던 격려를 되돌려 주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을 지금의 자리까지 이끈 것은 특별한 재능보다 예상치 못한 기회를 알아보고 붙잡으려 했던 용기였다고 회상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즐거움과 자신감을 전하고자 시작한 강의였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변화와 진심 어린 반응이 강의실 밖으로 이야기를 확장할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의약품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과학사의 중요한 성과는 언제나 비범한 천재들의 독창적인 발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뜻하지 않게 마주한 가능성을 지나치지 않고 끈질기게 탐구한 이들의 선택이 때로는 새로운 치료법을 탄생시키고 의학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저자가 프롤로그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러한 발견의 이면에 자리한 인간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우연히 찾아온 순간을 의미 있는 성취로 바꾸는 것은 결국 그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이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우연한 발견이 의학의 발전을 이끈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누구나 한 번쯤 복용해 보았을 타이레놀이다. 그 시작은 1880년대 독일의 한 약국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고 한다. 장염 치료에 사용할 나프탈렌 대신 아세트아닐리드가 잘못 전달되었는데, 뜻밖에도 이를 복용한 환자들의 열과 통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이 사건은 새로운 해열진통제 개발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893년 독일의 생리학자 요제프 폰 메링이 아세트아미노펜의 독성을 지적하면서 해당 성분은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반면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페나세틴은 널리 사용되다가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1948년 생화학자 버나드 브로디와 연구 보조원 줄리어스 액설로드가 약물의 대사 과정을 추적한 끝에 실제 진통 효과를 내는 성분은 아세트아미노펜이며 페나세틴의 대사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려 60년 가까이 이어진 오해가 바로잡힌 것이다. 이후 1955년 미국에서 타이레놀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약은 효과적인 마케팅과 아스피린의 부작용에 따른 반사이익까지 더해지며 세계적인 진통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랜 누명을 벗고 안전한 진통제로 인정받은 타이레놀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 되면서 그만큼 위험성을 간과하기 쉬워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의 '가용성 휴리스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주 접하고 익숙하게 느끼는 대상일수록 무의식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타이레놀의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은 과다 복용할 경우 간에서 독성 대사산물인 NAPQI가 증가해 심각한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타이레놀 500mg 제품이 약국의 10정짜리와 달리 8정으로 포장된 것도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오랫동안 사용된 약임에도 통증을 억제하는 정확한 작용 기전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이 신체적 통증뿐 아니라 사회적 소외감 같은 정서적 고통과 타인에 대한 공감 반응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결과를 일상적인 복용에서 감정이 둔화된다는 확정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결국 타이레놀의 역사는 익숙하다는 사실이 곧 안전하다는 증거는 아니며 약과 독의 경계는 적절한 용량과 올바른 사용에 달려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오히려 경계심을 늦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타이레놀의 역사가 하나의 의약품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과정이었다면 스페인 독감의 역사는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추적해 온 인류의 긴 수사 기록이라 하겠다. 1918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최소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대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명칭부터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들이 전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감염병 관련 보도를 통제한 반면, 중립국 스페인은 피해 상황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도하면서 발원지라는 억울한 오명을 떠안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바이러스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원인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유행이 끝났다. 그렇게 미제로 남았던 사건은 수십 년 뒤 과학자들의 집념으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다. 1951년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에 묻힌 희생자들의 폐 조직을 채취했다가 실패했던 요한 훌틴은 1997년 일흔셋의 나이로 다시 현장을 찾았다. 그가 '루시'라고 이름 붙인 여성의 폐 조직에서 확보한 시료는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거의 연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고, 마침내 2005년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체가 복원되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건너 다시 도전에 나선 훌틴의 행적은 과학적 성취가 얼마나 오랜 기다림과 끈질긴 탐구 끝에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연구가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과거의 비극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염병에 대응할 과학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작동 방식과 치료제의 원리를 범인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수사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 바이러스는 헤마글루티닌이라는 단백질을 이용해 인체 세포에 침입하고 세포 안에서 증식한 뒤에는 뉴라미니데이즈라는 효소로 세포 표면과의 연결을 끊어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는 바로 이 효소의 작용을 억제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도록 개발되었다. 특히 쌀국수의 향신료로 익숙한 팔각회향에서 얻은 시킴산이 타미플루 합성의 출발 물질로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처럼 바이러스의 구조와 증식 과정을 이해한 성과는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치료에 활용되었고 이후 감염병 연구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물론 치료제가 등장했다고 해서 감염병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에 대응하려면 지속적인 연구와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페인 독감의 수사 기록은 과거의 실패를 정확히 분석하고 축적된 지식을 다음 위기에 활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진 과학자들의 노력이 오늘날 인류의 대응 능력을 키워 왔다는 사실이 새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약의 탄생>이 다루는 이야기는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의 역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슐린의 발견과 특허를 둘러싼 논쟁, 실패한 농약 연구에서 탄생한 국소 마취제 리도카인, 모르핀의 대안으로 개발되었다가 심각한 중독 문제를 일으킨 헤로인 등은 의학의 발전이 언제나 인류에게 이로운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특히 경구 피임약과 비만 치료제, 탈모 치료제에 이르면 약의 역할은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에서 개인의 선택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부작용과 윤리적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하지만, 상업적 이해관계와 과장된 광고가 때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하기보다 그 성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에 받아들여졌으며 누구에게 이익과 부담을 안겨 주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의약품을 둘러싼 여러 사건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치료제가 널리 사용되기까지는 연구실의 성과뿐 아니라 임상시험을 통한 검증, 규제기관의 판단, 의료 현장의 경험 등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광고에서 강조하는 효능이나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만으로 약의 가치를 판단하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의 한계를 짚으며 과학적 근거를 확인하고 의심스러운 주장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면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던 약 상자에 적힌 성분명과 복용법, 주의사항도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 듯하다. 약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효능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효과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위험성까지 함께 살피는 일이다. 일상의 작은 알약 하나에서 출발해 과학과 산업,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