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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의 풍경
장강명 지음 / 해냄 / 2026년 10월
평점 :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읽어 보고 싶었던 <근미래의 풍경>. 그런데 책을 펼치기 전 띠지에 적힌 “이 짧은 소설들은 예언이 아니라 질문이다”라는 문장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미래를 다룬 소설이라면 흔히 첨단 기술이 만들어 낼 새로운 세상이나 그로 인해 발생할 위험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강명 작가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경고하는 대신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묻는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석하며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한층 발전한 기술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근미래의 풍경>은 이러한 상상에서 출발하여 출산과 육아, 노동과 인간관계, 죽음 이후의 애도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일상의 모습을 24편의 짧은 소설에 담아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점은 기술의 발전 자체보다 그것이 사회에 도입되고 확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는 사실이다. 인공자궁과 육아 안드로이드, 가정 관리 시스템과 디지털 제사 등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서비스는 저마다 현실적인 필요와 욕망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특히 개인의 취향과 소비를 넘어 사고방식까지 설계하는 초거대 기업 '네카팡'을 중심으로 기업의 이윤 추구와 사회 제도의 변화가 긴밀하게 맞물린다. 이는 저자가 꾸준히 탐구해 온 'STS SF(과학기술과 사회를 다루는 SF)'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여기에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과 언론 기사, 토크쇼 인터뷰와 기업 회의 등 다채로운 서술 형식을 활용해 실제 미래 사회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듯한 생생함을 더한다. 무엇보다 작품 속 기술들이 공상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현재의 경제구조와 사회적 요구를 바탕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이 책이 그려낸 미래는 낯선 상상의 세계라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책을 덮을 무렵에는 과연 기술이 만들어 낸 편리하고 완벽한 세상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인 <생각의 관문 앞에서>는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장면으로 시작한다. 막말로 인기를 얻은 3선 국회의원은 초거대 기업 네카팡이 여론과 사회 전반을 좌우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후보자를 거세게 몰아붙인다. 작품 속 사람들은 네카팡이 선별한 기사를 읽고 추천 영상을 시청하며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글을 쓰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후보자 역시 과거 네카팡의 윤리준칙위원회에 참여하며 기업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이처럼 두 사람의 공방이 절정에 이른 순간 뜻밖의 반전이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청문회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인공지능 시뮬레이터를 활용한 사전 연습이었던 것이다. 준비팀은 청문회에서 오가는 발언보다 포털에 올라갈 요약 영상과 인공지능이 작성할 기사의 제목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상대 정치인의 발언과 행동을 오랫동안 수집해 그의 반응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네카팡의 영향력을 비판하는 정치적 논쟁조차 정작 네카팡의 기술에 의존해 준비되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모순이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거대 기업의 권력을 견제해야 할 정치인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전문가들마저 자신들이 비판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기업의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윤리규칙이 오히려 네카팡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지배력을 강화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의의 개입이 도리어 기존의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는 역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네카팡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기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생각의 관문'이라는 제목이 지닌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는 듯하다. 정보에 접근하는 통로를 장악한 기업이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검색엔진과 추천 알고리즘에 일상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정보를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지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선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내렸다고 믿는 판단은 과연 어디까지 온전히 자신의 것일까?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작품은 멸종 동물 복원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다룬 <죽은 동물, 되살아난 동물, 죽일 동물>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사라진 도도새가 초거대 기업 네카팡의 합성생물학 기술로 부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네카팡은 복원한 동물을 원래 서식지에 돌려보내고 관광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지역 경제와 기업의 이익을 동시에 끌어올린다. 이후 멸종된 여행비둘기까지 되살려 식용으로 사육하고 레스토랑 체인을 운영하면서 생태계 복원은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기술의 활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대규모 개발 사업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보호하는 대신 나중에 복원하겠다는 약속만으로 환경 파괴를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철도 건설에 방해되는 동물을 일단 멸종시킨 뒤 공사가 끝나면 되살리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여기에 멸종한 줄 알았던 로키산메뚜기 떼가 농경지를 습격하자 네카팡의 회장은 유전자만 보관해 두면 언제든 복원할 수 있다며 아예 멸종시켜 버리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 이제는 어떤 종을 없앨 것인지 결정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셈이다.
이 작품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등장한 기술이 오히려 생태계 파괴의 면죄부가 되는 역설에 있다. 멸종 동물 복원이라는 놀라운 성취는 처음에는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수익과 개발의 효율성이 우선되는 순간 생명은 필요에 따라 없애거나 되살릴 수 있는 관리 대상으로 전락한다. 특히 여행비둘기를 먹는 것이 오히려 종을 보호하고 지구를 살리는 길이라는 네카팡 회장의 주장은 경제적 논리가 어떻게 환경 보호의 언어로 포장되는지를 보여 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복원 기술에 대한 믿음이 멸종 자체의 위험성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사라진 종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서 오랜 시간 형성된 생태계와 그 안의 복잡한 관계까지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은 인간에게 생명을 복원할 능력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마음대로 없앨 권리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과 윤리적으로 허용되어야 할 일은 분명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새로운 오만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공통 경험의 종말> 역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변화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라 기억에 남는다. 영화 <타이타닉>을 본 딸과 이야기를 나누던 주영은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과 딸의 설명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딸이 본 영화에서는 잭과 로즈의 역할이 뒤바뀌고 결말마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인공지능으로 제작한 성반전 버전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딸이 그마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요 장면은 쇼츠와 팬 제작 영상으로 대신하고 나머지는 AI가 요약한 영상을 배속으로 시청한 것이 전부였다. 주영은 친구들과 이 문제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더 이상 같은 작품을 통해 공통의 경험을 나누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자신들 역시 영상을 배속으로 시청하거나 불편한 장면을 수정하는 등 원작을 변형해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급기야 원작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주영조차 자신이 본 <벤허>에 다른 영화의 장면들이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젊은 세대의 감상 방식을 비판하던 기성세대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같은 변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작품이 단순히 세대 간 문화적 차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인공지능과 플랫폼이 콘텐츠의 제작과 소비 방식을 바꾸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공통 경험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동일한 장면을 떠올리며 감상을 나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개인의 취향과 편집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접할 수도 있다. 물론 과거에도 검열된 영화나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줄거리를 통해 작품을 접하는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변화를 무조건 문화적 퇴보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인공지능이 개인마다 다른 버전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시대에는 무엇이 원작이며 어디까지를 같은 작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다. 나아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공통의 기억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결국 작품은 각자의 취향에 맞게 편집된 세계를 경험하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 묻고 있다.
이 책의 매력은 과학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무조건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본다. 장강명 작가는 인공자궁과 육아 안드로이드, 디지털 제사처럼 편리함을 약속하는 다양한 기술을 통해 인간의 관계와 사회적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세밀하게 짚어낸다. 특히 기업의 이해관계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욕망을 함께 들여다보며 변화의 이면에 숨겨진 모순과 딜레마를 드러낸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줄 혜택에 주목하지만 그 대가로 무엇을 잃게 될지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다.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강조하듯이 이 소설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하는 질문에 가깝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발전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는 데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까지 결정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보여 주면서도 지금 우리의 선택과 책임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실현된 세상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도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켜 낼 수 있는 세상인가?라는 하나의 물음을 남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