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류 - 멋스럽고 운치 있게 서울을 감각하는 법
은모든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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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쁘게만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느새 풍류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해야 할 일은 늘 많고 하루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정작 계절의 변화를 살피거나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즐기고,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 잠시 머무는 일에는 점점 인색해진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익숙한 도시에서 풍류를 즐기는 법을 이야기하는 <서울 풍류>에 더욱 관심이 갔다. 풍류라고 하면 흔히 옛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나 한가로운 생활을 떠올리기 쉽지만, 은모든 작가가 말하는 풍류는 훨씬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자신이 사는 곳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맛과 멋과 흥을 발견하며 오늘의 삶을 제대로 즐기는 일에 가깝다.

소설가 은모든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직접 보고 맛보고 즐긴 것들을 담아낸다. 오래된 노포에서 만나는 추억의 음식부터 매화가 풍성하게 피는 장소, 성곽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도심에서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의 다양한 얼굴이 책 속에 펼쳐진다. 꽃과 술, 음식과 산책, 계절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에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즐거움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서울 풍류>는 특별한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놀고 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저자가 말하는 풍류의 바탕에는 잘 놀아야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국악 공연에서 듣게 되는 ‘잘한다!’라는 추임새를 떠올리며 잘한다는 말을 제대로 건네는 일조차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말한다. 치열한 경쟁과 평가에 익숙한 우리는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좀처럼 후한 말을 건네지 못한 채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하려 하기보다 일단 시작하고 꾸준히 이어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쓰고 싶다면 우선 써야 하고 오래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스스로를 환기할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잘하고 싶은 일은 꾸준히 하고, 계속하기 위해서는 잘 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잘 노는 일의 중심에는 서울이 있다. 한강과 천변을 걸으며 계절을 느끼고, 궁궐과 미술관을 찾고, 작은 서점이나 음악 감상 공간을 기웃거리며 새로운 것을 만난다. 낯선 동네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마음에 남은 장소는 다시 소설 속 이야기로 옮겨가기도 한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나 역시 이런 대목을 읽으며 익숙했던 풍경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서울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대전에서 지내며 이 책을 읽다 보니 정작 지나치고도 보지 못했던 장소와 즐거움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결국 풍류란 멀리 떠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곳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책은 맛의 풍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서울 곳곳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맨 처음으로 책은 연희동의 오래된 식당들을 따라가며 그 안에 쌓인 맛과 기억,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양은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엽차와 육수, 어린 시절 먹던 냉면의 맛은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했던 외식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렇게 한 끼의 음식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과거와 연결되고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어 저자는 노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는 사라진 피맛골을 떠올린다. 나 역시 서울에서 오래 살며 피맛골의 유래와 그곳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이 대목이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과거 서민들이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다니던 골목이 수백 년 동안 식당과 주점이 모인 공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서울의 오래된 맛이 단순한 음식 이상의 시간을 품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라진 피맛골의 흔적은 종각의 오래된 빈대떡집 ‘열차집’으로 이어진다. 1950년부터 이어져온 이곳에는 옛 피맛골의 사진과 세월이 묻은 낙서가 남아 있고 맷돌에 직접 간 녹두를 돼지기름에 지져낸 빈대떡 역시 오랫동안 지켜온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작가는 요즘의 바삭한 전과는 다른 그 맛과 식감을 경험하며 익숙한 취향만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맛을 시도해 보는 것 또한 작은 모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벽을 가득 채운 서로 반대되는 정치적 구호들이다. 처음에는 첨예한 대립의 흔적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것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오가며 같은 음식을 먹어 왔다는 공존의 증거로 바라본다. 오래된 음식 한 접시 안에서 개인의 추억과 서울의 역사,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발견해내는 것. 바로 이런 시선이 <서울 풍류>가 보여주는 맛의 풍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각각의 이야기 뒤에 덧붙인 ‘풍류 노트’도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노포 이야기에 이어지는 풍류 노트에서는 '자녀나 조카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오래된 식당’을 노포의 기준으로 제시하며 하천이나 시장 주변을 살피고 제철 메뉴가 있는 가게를 눈여겨보는 등 자신만의 노포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작가의 경험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가 직접 자신만의 풍류를 찾아 나서게 한다는 점에서 <서울 풍류>만의 흥미로운 구성이 아닐까 싶다.

결국 <서울 풍류>가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의 좋은 장소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만은 아닌 것 같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바라볼 때 마음이 움직이는지조차 잊기 쉽다. 은모든 작가는 그런 우리에게 계속 살아가고, 계속 무언가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들을 곁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먹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얻은 경험이 다시 글쓰기로 이어지는 작가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잘 노는 일’ 역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서울의 맛과 멋과 흥을 소개하는 에세이인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래 이어가며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지금은 대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익숙했던 도시를 새삼 돌아보게 만들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풍경과 경험이 적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풍류가 반드시 서울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도시에 사느냐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얼마나 관심 있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발견하느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울에서 미처 누리지 못했던 풍류를 아쉬워하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맛과 멋과 흥에도 조금 더 눈을 돌려보고 싶다. <서울 풍류>가 내게 남긴 가장 큰 변화는 어쩌면 바로 그렇게 익숙한 일상을 다시 바라보고 싶게 만든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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