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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 - 김남희 잡문집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8월
평점 :
제목만으로도 한 번쯤 멈춰 보게 되는 책이 있다.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도 그런 책이었다. 고양이가 담긴 표지와 함께 '고양이 같은 잠'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고, 바쁘게 움직이고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요즘 우리에게 왜 이런 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궁금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여행작가 김남희 작가가 2003년 첫 여행을 시작한 이후 20년 넘게 써온 일기와 세계 곳곳에서 직접 촬영한 고양이 사진을 함께 엮어낸 책이다. 그날 먹은 음식과 하루의 지출처럼 사소한 기록부터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당시의 고민과 감정,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생각까지 수십 권의 일기장에 남겨진 문장들이 책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 다마스쿠스의 시장 골목과 그리스의 오래된 항구, 알바니아의 숲을 비롯해 여러 여행지에서 마주친 고양이들의 사진이 더해져 저자가 지나온 시간과 여행의 흔적을 글과 사진으로 함께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인상적인 특징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에, 어떻게든 기록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여행지의 특별한 풍경이나 경험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2003년 1월 인천 포구에서 시작된 여행의 기록이 2026년 여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책이 한두 번의 여행을 정리한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길을 걷고 낯선 곳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과 나이 들고 변해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무엇이든 더 많이 이루려 하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는 법에 대한 생각이 오랜 시간의 기록 속에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결국 이 책은 세계 곳곳을 걸어온 한 여행자의 기록이면서 빠르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진 우리에게 자신의 속도와 보폭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저자는 먼저 여행을 다니면서 유난히 고양이에게 눈길이 갔던 이유를 들려준다. 고양이는 주변의 흐름이나 사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은 채 제 방식대로 움직이고 쉬어 간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자 역시 걷던 속도를 늦추게 되고, 꼭 세워 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야 할 일과 목표로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 고양이는 가만히 머무는 시간도 충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고양이는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귀여운 동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쉼 없이 성과를 내고 성실해야 한다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잠시 떨어져 쉬고, 멈추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일 역시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 제목 속 ‘고양이 같은 잠’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계속 힘을 쏟는 것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책의 시작부터 또렷하게 드러나며 이후 이어질 저자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여행과 삶에 대한 짧은 문장 사이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만난 고양이들이 불쑥 나타난다. 그 사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과 관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시선이 옮겨가게 된다. 특히 ‘한 사람의 영원’이라는 글에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과연 그 사람의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지 묻는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해도 결국 기억 속에 남는 것은 특정한 순간의 표정이나 말, 그때의 분위기처럼 아주 제한된 장면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잠시 마주했던 모습을 그 사람 전체인 것처럼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짧게 스쳐간 한순간이 오랫동안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여행지에서 만난 나이 든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버스에서 길을 묻자 주변의 여성들이 함께 나서서 방법을 알려주고, 말을 튼 뒤에는 과자와 빵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여자들이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나이 든 여자들은 오랜 시간 가족과 주변 사람을 돌보며 살아온 경험 덕분인지 타인의 곤란함이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온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계산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 자신보다 타인의 안부를 먼저 살피는 태도에서 삶을 오래 살아온 사람만의 너그러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 역시 너무 공감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정을 조금 더 이해하고 기꺼이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자신도 그런 여자들처럼 너그럽고 순박하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이 오래 남았고 나 역시 그러고 싶다.
삶에 대해 이야기한 여러 글 가운데 '삶을 견디는 재능'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저자는 매일의 노을과 꽃향기, 공기와 바다의 소리가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에서 작은 위로를 발견한다. 거창한 사건이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변화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태도야말로 삶을 버텨내는 자신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삶을 견디는 힘은 반드시 강한 의지나 대단한 목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에서도 생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하루 속 작은 변화에 여전히 마음이 반응한다는 사실 자체가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는 여행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받아들여온 시간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관계의 빈자리, 나이 들어가는 마음과 사소한 것에서 얻는 위로까지 저자가 지나온 여러 순간들이 짧은 글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모든 것을 잘해내거나 흔들리지 않는 삶을 말하기보다 때로는 지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이 책은 삶에 대한 특별한 답을 제시한다기보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공감이 갔다.
결국 이 책이 전하는 위로는 삶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보다는 힘든 순간이 있어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데에 가깝다고 본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한순간의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고 외로움을 피할 수 없어도 타인의 온기에 기대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거창한 행복이 아니더라도 하루의 작은 변화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고양이처럼 조금 느슨해지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오랜 시간 걷고 쓰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을 찾아온 저자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잘 살아낸다는 것은 끝까지 애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도 다시 자신의 보폭으로 하루를 이어가는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