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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진화의 세계 -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발견한 생존의 법칙
이정모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8월
평점 :
<극한 진화의 세계>라는 제목에 먼저 눈길이 갔다. 대체 생명체는 어디까지 견디고, 또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인간이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심해와 극지, 화산섬 같은 극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온 26종의 동식물을 통해 진화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400도에 가까운 고온의 물 주변을 터전으로 삼는 폼페이웜, 우주 공간에서도 버틸 수 있는 물곰,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심해에 적응한 초롱아귀 등 책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의 독특한 생존 전략을 그저 흥미로운 자연 현상으로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명체들이 극한의 환경에 맞춰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렸는지 살펴보며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진화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흔히 진화라고 하면 더 강해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는 방향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때로 필요 없는 감각이나 기관을 없애고, 먹이와 호흡 방식은 물론 성별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난 방식으로 변화해 왔다. 여기에 11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최신 과학 연구를 더해 이들의 생존 전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심해 1000미터에서 시작해 극지와 화산섬을 거쳐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극한 환경인 도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진화가 단순히 더 강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달라져 온 결과임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책의 첫 번째 주인공은 수심 600미터 안팎의 어두운 바다에 사는 마크로핀나 미크로스토마이다. 머리가 투명하고 그 안에 관 모양의 눈이 들어 있는 이 물고기는 한때 눈이 없는 생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살아 있는 모습이 촬영되면서 위를 향한 눈이 필요할 때 앞으로 회전하고 투명한 머리는 빛을 통과시키면서 눈을 보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먹이가 드문 심해에서는 빠르게 움직이기보다 기다리고 관해파리 주변의 먹이를 이용하며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기이하게만 보이는 모습이지만 저자는 이를 심해라는 환경에 맞춰 이루어진 진화의 결과로 바라본다. 빛이 부족하자 더 적은 빛도 감지할 수 있는 눈이 필요했고 에너지가 부족하자 빠름보다 기다림이 유리해졌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극한을 단순히 견디기 힘든 조건이 아니라 기존의 기준이 바뀌는 지점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익숙한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생명은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고 마크로핀나 미크로스토마의 독특한 모습 역시 그런 선택이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진 결과인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생명체는 벨처바다뱀이다.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가지만 아가미가 없어 반드시 수면으로 올라와 폐로 숨을 쉬어야 하는 파충류이다. 대신 긴 폐에 공기를 저장하고 심장 박동과 움직임을 줄여 한 시간 넘게 잠수하기도 하며 납작한 꼬리로 물을 효율적으로 밀어낸다. 바닷속 생활에 맞춰 염분을 배출하는 기관을 갖추고 피부를 통해 일부 산소를 받아들이는 능력도 생겼다. 육지에 알을 낳으러 돌아가는 일부 바다뱀과 달리 새끼까지 바다에서 낳는다는 점은 그 조상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육지에서 바다로 생활 영역을 옮겨 온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벨처바다뱀의 삶에서 더 눈길을 끈 것은 이렇게 바다에 적응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물속에서 살지만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비가 내려 만들어지는 담수에 의존하며 낮은 수온 때문에 모든 바다로 퍼져 나갈 수도 없다. 바다는 넓은 생활 공간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공기와 담수를 찾아야 하는 숙제를 남긴 셈이다. 결국 벨처바다뱀의 모습은 진화가 모든 결점을 없애 완벽한 생물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여러 한계를 그대로 안은 채 주어진 조건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오리너구리 역시 기존의 분류 기준만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체이다. 털로 덮인 포유류이면서 알을 낳고, 젖꼭지 없이 피부에서 나오는 젖으로 새끼를 키운다. 물속에서는 눈과 귀를 닫은 채 부리에 있는 전기수용기와 기계수용기로 먹이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수컷의 뒷다리에는 독침까지 달려 있다. 물갈퀴와 발톱을 함께 지닌 몸도 물과 육지를 오가며 살아가는 생활에 맞춰져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특징들이 한몸에 모여 있어 처음 발견됐을 당시에는 여러 동물을 이어붙인 가짜가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러나 오리너구리의 이야기가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특징을 덜 진화한 모습이나 불완전한 중간 단계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오리너구리는 다른 포유류와 오래전에 갈라져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단공류의 한 계통이다. 우리가 익숙한 포유류의 모습이 진화의 정답인 것도 아니며 알을 낳고 전기를 감지하는 오리너구리 역시 생명이 선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길이다. 결국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곧장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라 수많은 갈래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틀린 답이 아니라 다른 답이라는 오리너구리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분류와 기준만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극한 진화의 세계>를 읽고 나면 진화를 바라보는 기준부터 달라진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더 강해지고 더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환경에 맞춰 때로는 기존의 능력을 줄이고 익숙한 방식을 버리면서까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투명한 머리 속에 눈을 숨긴 마크로핀나 미크로스토마, 바다에 살면서도 공기를 찾아 수면으로 올라와야 하는 벨처바다뱀, 여러 동물의 특징을 뒤섞어 놓은 듯한 오리너구리의 모습은 모두 그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하나의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조건에서 서로 다른 해답을 만들어 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이상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여겼던 모습조차 그 생명에게는 오랜 시간 살아남아 온 가장 적절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책의 시선은 마지막에 인간에게로 향한다.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해 온 생명체들을 바라보다 보면 이제는 인간 자체가 다른 생명들에게 하나의 극한 환경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만든 도시와 오염, 기후변화, 사육과 길들이기 속에서 수많은 생명은 또다시 살아남기 위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결국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까지 되묻게 한다. 수많은 생명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온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우리의 기준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남겨 주는 일이 아닐까. <극한 진화의 세계>는 진화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 역시 수많은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