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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이 내리는 시간
브루나 단타스 로바토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7월
평점 :
띠지 속 “200쪽 남짓한 이 소설은 낭비되는 문장이 하나도 없다”라는 문장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한 여성이 고향에 남은 어머니와 화상통화를 이어 가며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매일 반복되는 스카이프 통화를 중심으로 서로에게 전하지 못하는 일상과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소설은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보다 일상의 대화와 침묵을 통해 멀어진 거리와 변해 가는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며 조금씩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어머니 역시 먼 곳에 있는 딸을 걱정하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작품은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식과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을 함께 담아내며 떠남과 남겨짐이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과정임을 보여 준다. 짧은 분량 속에서도 유학, 가족, 성장, 돌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밀도 있게 풀어내며 오늘날 많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 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의 이야기는 미국 버몬트의 대학 기숙사에 도착한 주인공이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른 학생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자신의 방을 개성 있게 꾸며 가는 것과 달리 주인공의 방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가지 물건만 놓여 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마련하며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가고, 브라질에 있는 어머니와는 화상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전한다. 통화를 하기 전에는 방을 정리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 주려 애쓰고 어머니 역시 걱정을 감춘 채 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화면 너머에는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그리움과 걱정이 잔잔하게 흐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인공은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도 조금씩 적응해간다. 아름답게 물든 가을 캠퍼스를 거닐고 친구와 사진을 찍으며 새로운 일상을 즐기는 순간에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잠시 옅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그 감정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늘 자리하고 있다. 친구와 부모님께 보낼 사진을 함께 찍으며 웃는 장면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현재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작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고향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 내며 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공은 파티에 참여하고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며 미국 대학 생활에 조금씩 스며든다. 낯선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또래 학생들의 생활방식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도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매일 밤 이어지는 어머니와의 화상통화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딸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전하며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의 말보다 표정과 목소리에서 미묘한 불안과 외로움을 먼저 읽어 낸다. 겉으로는 새로운 세상에 익숙해지는 듯 보이지만, 낯선 환경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흔들림은 끝내 감출 수 없다. 서로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익숙한 사랑의 방식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많은 공감을 자아낸다.
이후 소설은 화상통화를 단순한 연락 수단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공간으로 그려낸다. 모녀는 서로의 하루를 전하고 고향의 소식과 세상의 사건을 함께 나누며 멀어진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간다. 특별한 사건보다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화면 속 작은 얼굴은 오히려 서로를 가장 가까이 이어 주는 창이 된다. 비록 각자의 삶은 점점 달라지고 이전처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만으로도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작품은 이 과정을 통해 가족이란 언제나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변함없이 마음을 내어 주는 관계임을 전하고 있다.
소설은 딸, 어머니. 재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서는 낯선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딸의 시선을 따라가며 성장과 적응의 과정을 보여 준다면, 중반부에 이어지는 '어머니'에서는 같은 시간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비추며 작품의 의미를 한층 깊게 만든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나 역시 처음에는 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고 가족에게는 괜찮은 모습만 보여 주려는 마음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점이 어머니에게로 옮겨지는 순간, 딸이 미처 알지 못했던 빈자리와 외로움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딸이 멀리서도 씩씩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평범한 집안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지만 딸이 떠난 집은 이전보다 훨씬 적막하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 말라 버린 화분을 발견한 어머니는 끝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작은 화분 하나를 잊고 지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딸이 떠난 뒤 무기력하게 흘러간 시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남겨진 사람의 일상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그동안 활기차게 생활하는 딸의 모습만 바라보던 독자에게 부모의 사랑과 기다림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푸른빛이 내리는 시간>은 멀리 떨어져 살아가게 된 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성장,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소설은 물리적인 거리가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딸은 새로운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어머니는 딸이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뎌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공간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서로의 하루를 전하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작은 노력들을 통해 여전히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작품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한쪽의 희생이나 헌신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끝까지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가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전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밤 화면을 사이에 두고 안부를 묻던 모녀의 평범한 일상이다. 그 익숙한 풍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여운으로 남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부모의 곁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본 사람이라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지내며 그리움을 견뎌 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전하는 감정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나니 부모님께 먼저 안부를 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