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요 작가의 신작이라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컴퓨터과학과 신학, 중세철학을 바탕으로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세계를 그려 낸 여섯 편의 SF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오래된 집 전화기를 통해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음성 메시지를 듣게 되는 이야기, 감전 사고 이후 신으로부터 세상을 종말시킬 명령어를 부여받는 인물, 예언자와 마술사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해석한 설정, 인공 척추 시술을 받은 딸의 존재를 둘러싼 의문 등 각 작품은 익숙한 현실에 낯선 상상력을 더하며 독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지금은 지어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설정들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게 만든다.

저자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로 박지리문학상과 문윤성SF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 오며 한국 SF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번 책에서는 기존에 계간지와 웹진을 통해 발표했던 작품들과 미발표작이 함께 실려 있으며 표제작 <존재의 대연쇄>는 공개 당시 독자와 편집부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특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하며 인간 존재와 현실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책의 맨 처음에 실린 <사랑하는 신의 생일>이다. 소설의 주인공 유하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어린 시절 집에서 사용하던 오래된 유선전화기를 발견한다. 부모가 모두 바깥일을 하며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던 유하는 어린 시절 아무 번호도 누르지 않은 채 수화기에 대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을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고 여기며 외로움을 견뎠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발견한 전화기는 유하에게 그저 낡은 물건이 아니라 외롭지만 마냥 슬프다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유품이었다.

유하는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전화기의 플러그를 벽면 콘센트에 꽂아 본다. 전화 회선과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신호음 정도만 들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수화기에서는 뜻밖에도 자신을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라고 소개하는 남자의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그는 로마제국의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였지만, 처음에 유하는 그 목소리를 전화기 안에 숨겨진 장난스러운 자동응답 기능 정도로 생각한다. 그렇게 별다른 의심 없이 수화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기 시작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유하와 서기 41년의 로마 황제를 연결하는 기이한 대화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유하는 전화기 너머의 존재가 단순한 녹음 음성이 아니라 실제로 서기 41년을 살아가는 칼리굴라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의 죽음이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왔음을 알게 되면서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이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깊은 갈등에 빠진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단순한 시간 교류를 넘어 인간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나 역시 주인공 유하와 함께 '과연 역사는 바뀌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흘러가야 하는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 앞에서 오래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야기가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두 사람의 관계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연결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대화였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쌓이면서 유하와 칼리굴라는 각자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 과정에서 유하는 자신의 선택과 희생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완성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의 삶이 마침내 하나의 세계로 이어지는 장면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시간조차 뛰어넘어 서로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겼다.

<존재의 대연쇄>는 미래 기술과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삼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존재와 선택, 관계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SF 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여섯 편의 작품은 컴퓨터과학과 신학, 철학, 역사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작품들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기에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 의미를 연결하고 상상하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게 된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작품 속 장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유선전화기, 인공 척추, 종말을 부르는 프로그래밍,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조금씩 흐리며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 스스로 사고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이끄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