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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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해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임을 밝힌 작품이다. 40여 년간 영국 현대문학을 이끌어 온 저자가 더 이상 다음 작품을 예고하지 않은 채 내놓은 이 소설은 신작이라는 범주를 넘어 하나의 문학적 정리로 읽혀서 더 오랫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다. 책은 2026년 1월 22일, 영국과 미국,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에서 동시에 출간되며, 저자의 여든 번째 생일 직후라는 시점 또한 이 책이 지닌 상징성을 분명히 하는 듯하다. 출간을 앞두고 영국에서 예정된 이언 매큐언과의 대담 역시, 이 책을 단순한 발표가 아닌 문학적 사건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에서 저자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정리하거나 업적을 회고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과 상실, 역사와 진실, 기억의 불확실성이라는 그가 평생 담아온 온 주제들을 다시 호출하며, 삶의 끝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지를 이야기하며 더 깊은 여운과 울림을 남긴다.


소설의 시작은 화자는 여러 의학적 사례를 계기로, 기억이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때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인식과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제시된다. 화자는 우리가 기억을 반복해 말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점차 변형되고 미화된다는 점을 짚으며, 만약 뇌가 경험을 왜곡 없이 그대로 재생한다면 우리가 믿어온 자기 서사는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기억은 위로나 추억의 영역이 아니라 정체성을 교정하고 때로는 위협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어 화자는 기억과 도덕의 문제로 사고를 확장한다. 뇌 속에 먹은 음식이나 사소한 경험 뿐 아니라, 말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고백, 거짓말과 위선, 잔혹함과 회피의 순간들까지 시간 순서로 저장되어 있다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심문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기억은 선택적으로 불러오는 회상이 아니라 책임과 판단을 되돌려주는 기록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 속에서 화자는 이 단계에서 언급할 두 가지를 분명히 하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하나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유가 본격적인 서사가 아니라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위한 사전 정리임을 밝히는 동시에 왜 이 책이 기억이라는 주제에 이토록 집착하여 이야기 하는 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는 듯하다. 특히 소설 한가운데서 마지막 작품임을 직접 선언하는 방식은 이례적이며 그 자체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후 과연 이후 진행될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왜 저자는 이렇게 서두부터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 밝히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2장은 이야기의 시작을 담고 있다. 화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하나의 연속된 서사가 아니라 긴 공백을 사이에 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힌다. 전반부는 오래된 기억과 사진 몇 장에 의존해 재구성된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이미 작가가 된 이후 수첩과 일기 같은 동시 기록에 기대어 서술된 이야기라는 거다. 그러나 화자는 기록이 기억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통념을 곧바로 부정한다. 기록 역시 기억하게 된 것을 적은 결과이며 나중에 글로 쓸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왜곡과 누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실화이지만 기록과 기억 모두 완전하지 않다는 단서를 달고 출발한다.

이어 화자는 두 중심인물의 이름을 바꿨음을 밝히고 자신이 작가임에도 사람들이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를 설명한다. 삶이 곧바로 픽션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지나 천천히 썩어 퇴비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이야기로 변환된다는 거다. 그는 배경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하며 이야기의 핵심만 남기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여 자꾸만 그의 이야기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화자가 두 인물을 모두 만나지 못한 수십년의 시간이다. 그 중간의 사건들은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개략적인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이야기 역시 결함 있는 기억 위에 세워진 구조임이 드러난다. 이를 위해 앞선 책의 시작에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라 자꾸만 화자의 이야기들에 설득당하며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화자는 세 사람이 옥스퍼드에서 만났던 시절과 자신의 학부 과정, 전공 변경과 좌절을 간략히 서술하며 이 모든 것이 스티븐과 진이 서로를 만나게 된 계기였음을 밝힌다.

이처럼 2장은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 서사가 어떤 조건과 한계 속에서 전개되는 지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특히 화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꾸며낸 픽션이 아니라 실화라는 점이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며, 다만 기억과 기록의 불완전성 때문에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 작품을 허구로 읽기보다 저자가 직접 겪고 오래 품어온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고백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저자의 마지막 책이라고까지 말하니 자연스레 그 이야기들에 집중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후 전개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아온 끝에 40년이라는 공백을 지나 다시 재회하고 결국 결혼에 이르는 스티븐과 진, 그리고 그들 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지켜보는 화자가 중심에 놓인다. 이들의 관계는 특별한 사건의 연속이라기보다 중년과 노년의 삶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라 더욱 공감이 되어진다. 화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불안과 불만, 지나온 시간에 대한 해석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위치에 머물며 한 커플의 삶이 다시 이어지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끝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점차 떠남과 도착이라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출발과 도착, 귀환이라는 질서를 전제로 살아가지만 삶 전체를 놓고 보면 도착이 먼저 주어지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그리고 그 떠남은 더 이상 새로운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말,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완곡한 언어들, 죽음을 둘러싼 표현의 변화들을 차분히 나열하며, 삶의 끝이 어떻게 말해지고 받아들여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어 마지막에 다다를 수록 자꾸만 먹먹해진다. 화자가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과정은 특정 인물의 비극을 강조하기보다 결국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삶의 마무리를 담담히 응시하게 만든다.

책에서 줄리언 반스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유한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박함과 동시에,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비틀어 바라보는 유머가 책 전반에 기조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을 앞둔 작가로서 사물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전보다 한 발 물러선 위치에서 관찰하며 그 거리에서 생겨나는 아이러니와 통찰을 놓치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비장해지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재치와 절제된 웃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층 가볍게 읽히면서도 읽고 난 뒤에는 오래 남는다. 웃음과 씁쓸함, 명료한 문장과 깊은 성찰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저자가 평생 탐구해 온 기억과 정체성, 삶의 끝에 대한 질문들이 가장 정제된 형태로 제시된다. 책을 덮고 나면 제목이 지닌 의미가 뒤늦게 실감이 나게 만들며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두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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