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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 남은 김미자
김중미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평점 :
김중미 작가의 에세이라서 읽게 된 책이다. 가족에 대한 기록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한 시대의 풍경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동안 아동청소년문학을 통해 사회의 여러 모습을 꾸준히 다뤄 온저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기록한 에세이다. 인지장애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에서 시작된 이 책은 한 가정의 기억을 따라가며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던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책은 가족 내 돌봄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세대 간의 연결과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시간은 외할머니의 삶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가족 관계와 사회 구조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 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경험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데 집중하며 개인의 삶이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한 가족의 이야기를 읽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돌아보게 되며 그 먹먹함과 긴 여운을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다.
책의 프롤로그는 저자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이상화된 모성의 이미지와 자신의 경험 사이의 간극을 정리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저자는 그로 인해 흔히 말하는 어머니의 품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지 못했다. 인천으로 이주한 이후 어머니의 삶은 점차 불안정해졌고, 경제적, 의료적 여건 속에서 몸과 마음의 병을 겪게 된다. 이러한 삶의 조건은 어머니의 성격과 가족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인지장애가 진행되면서 어머니는 기억을 하나씩 잃어 가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와 조심스러운 말투는 끝까지 남아 있다. 저자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어떤 딸이었는지,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였는 지를 다시 묻는다. 동시에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신으로 이어지는 세 세대의 삶을 돌아보며 완벽한 엄마가 되려는 노력과 일과 돌봄을 병행하려는 시도가 모두 쉽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글 속에 담긴 저자의 생각이나 감정들은 단지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서 더더욱 어머니의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게 되고 먹먹해진다.
책은 인지장애로 기억을 잃어 가는 어머니를 돌보는 현재의 장면에서 출발하여 저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김미자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 시선을 넓혀 간다. 저자는 오랫동안 가족의 가난을 견디며 살아온 것을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결과로 여겨 왔지만 형제와 친척들의 기억을 따라가며 어머니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가난 그 자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가난이 반복적으로 만들어 낸 이주와 단절이었다. 더 낮은 주거비를 찾아 옮겨 다닌 동네들에서 관계는 쉽게 이어질 수 없었고 어머니는 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위치에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자자는 현재의 자신이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지나온 시간 위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외할머니와 조부모 세대로 확장되며 가족을 둘러싼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장에서 타협하지 않던 외할머니의 태도, 항구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커피를 내주던 모습은 당시 지역 공동체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또한 어린 시절 처음으로 꿈이라는 질문을 받았던 경험은 저자가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이른 시기에 현실을 체념하도록 요구받았는 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세대와 계층, 지역의 조건이 한 사람의 삶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자는 기억을 잃은 어머니에게 끝까지 남아 있는 역할이 '엄마’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녀의 이름과 관계는 흐릿해졌지만 붙잡아 주어야 할 존재가 있다는 감각과 먼저 챙기려는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남아 있는 이 정체성은 존경스럽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한 사람의 삶이 수많은 이름과 역할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마지막에 남은 것이 오직 ‘엄마’라는 자리뿐이라는 사실에서 저자는 강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고 바로 '엄마만 남은 김미자'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이다. 이 말들은 돌봄의 의미를 넘어 개인으로서의 삶이 어디까지 보존될 수 있는 지를 되묻게 하며 나 역시 딸이자 엄마이기에 무척이나 울컥해졌다.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어머니의 인지장애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그 삶이 놓여 있던 조건을 함께 바라본다. 요양원이 좋다고 말하는 김미자의 선택은 돌봄의 편의가 아니라 ‘엄마’라는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구로 읽혀서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저자는 외할머니, 이모, 어머니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을 따라가며 반복된 인지장애가 단순한 유전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감내해 온 삶의 무게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짚는다. 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개인이 사회적 역할 속에서 어떻게 소진되는 지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책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다시 짚고 있다. 밥상을 차리는 일을 통해 사랑을 전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저자가 직접 자녀를 키우며 비로소 이해하게 된 일이다. 반복적인 노동과 시간의 투입으로 유지되는 과업 중심의 돌봄은 많은 여성에게 공통된 삶의 방식이었으며 이는 부족함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도달한 결과였던 거다. 저자는 자신의 선택 역시 그러한 맥락 위에 있음을 인정하며 후회나 미화 대신 서로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그렇게 이 책은 돌봄과 노동, 신념과 공동체가 한 개인의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차분히 정리하며 일상의 실천이 어떻게 사회적 가치로 확장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어머니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의 이야기인 책 속의 이야기는 더 많은 공감을 자아내며 몰입하게 되고, 이태껏 미처 깨닫기 못했던 그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