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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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신작이라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출판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존재해온 편집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1990년대 초 교열자로 일을 시작해 평생을 문학 편집자로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을 만들며 겪는 관계와 사건,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천천히 구축되어 가는 삶의 모습을 담아낸다.


주인공은 내성적이고 순응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원고와 책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차분하게 쌓아간다. 작품은 단순히 직업적인 기록을 넘어 노동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일의 의미와 결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책을 만든다는 일이 지닌 사회적이고 인간적 함의를 탐색하며 일과 사람, 그리고 관계를 둘러싼 균형을 담담한 문체로 드러낸다. 편집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세계를 조명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지를 차분하게 보려주고 있다. 책 덕후인 내가 이 이야기들에 완전히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주인공 석주가 스무살이 되고 하게 된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도시 종합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역사를 죽음과 닮은 학문으로 여기지만 답사와 박물관 수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될 수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일상에 즉각적인 활기를 불어넣지는 못한다. 석주에게 있어 변화의 계기는 문학을 통해 찾아온다. 문학 창작 동아리와 청강으로 참여한 소설 창작 수업에서 그녀는 글을 쓰고 비평받는 과정을 경험한다. 그곳에서 석주는 문학을 단순히 좋은 감상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배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혹평과 자기 검열 속에서 위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문학을 향한 애정이 취미를 넘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졸업식 날, 석주는 부모가 당연하게 여긴 교사의 길을 거부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열정만으로 미래가 열리지는 않았다. 한동안 방황을 겪은 끝에 그녀는 스물넷의 나이에 출판사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입사한다.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과 출판 현장의 노동이 어떻게 교차하며 한 개인의 삶을 형성해 가는지를 아주 차분하게 보여준다.


석주는 신출내기 교열자로서 원고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고자 했다. 깐깐하고 철저한 오기서 과장 밑에서 교정과 교열을 배우며 기본기를 다졌고 인문교양부 편집자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편집’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곳은 정해진 규칙이나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석주는 그 불확실함 속에서 책을 만드는 일에 점차 몰입하며 자신의 열정을 발견한다. 그녀에게 열정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은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을 차분히 길들이며 꾸준히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에 남는 것은 그것을 지탱하는 의지가 되었고 석주는 그 의지를 통해 책을 만드는 일을 단순한 직무가 아닌 삶의 중요한 자리에 놓으며 열정보다 더 근본적인 지속의 힘을 배워나갔다. 이렇게 하나씩 쌓아가는 석주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깊이 있게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나 역시 비슷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불안과 서투름으로 가득했지만 시간이 쌓이며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던 경험이 석주의 여정과 겹쳐졌고 그렇기에 석주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 게다가 석주의 그 과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책을 편집하는 여정이었기에 석주가 겪는 성장과 깨달음은 더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석주는 편집자 소모임에서 잡지 편집자 조원호를 만나며 일과 사랑이라는 두 축이 동시에 그녀의 삶 속에 들어오게 된다. 계획할 수 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상할 수 있지만 언제나 예상을 빗겨가는 편집의 세계처럼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우연과 불완전함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은 결핍이 아니라 매력으로 다가왔고 석주는 원호와의 관계에서 여행 같은 뜨거움보다는 매일의 산책 같은 지속성을 발견하며 원호에게 점차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석주에게 일과 사랑은 서로 닮아 있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압도하기보다 스며들며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원호와의 관계는 매일의 산책처럼 이어졌고 편집자로서의 일 역시 담당 작가와 함께하며 점점 더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아한다는 마음이 언제나 기쁨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네 삶 또한 그렇듯 석주의 일과 관계 모두에 그림자를 드리워지게 된다. 석주는 그제서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상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석주가 책을, 그리고 편집이라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깨닫게 되면서 정말 잔잔하게 흘러가듯 보이는 그녀의 이야기는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과 삶을 응원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 책은 편집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배경으로 하여 한 여성이 어떻게 자신만의 삶의 무게와 의미를 찾아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겉으로는 잔잔히 흘러가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작품 속 석주가 끝내 붙잡은 것은 화려한 성취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자리이자 매일 꾸준히 이어가는 일의 과정이었다. 동시에 생활처럼 곁에 머무는 사랑, 그리고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까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오직 그녀의 것'으로 자리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노동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삶의 가치가 구현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그 노동이 내가 좋아하는 책과 문학이 존재하기 위한 일이었기에 더욱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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