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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댄 모든 것 -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
마쓰모토 도시히코.요코미치 마코토 지음, 송태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9월
평점 :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라는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일반적으로 전문가와 환자는 명확히 역할이 구분되는 관계로 인식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고정된 역할을 벗어나 중독이라는 주제로 같은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의 입장에서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지점이 신박하면서도 흥미로웠고 이 책에 기대를 높게 할 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문학 연구자 요코미치 마코토와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도시히코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두 사람 모두 중독을 겪은 당사자로서 일방적인 조언이나 해석이 아닌 상호 교차적인 시각을 통해 중독의 다양한 양상을 조명한다. 책에서 다루는 중독의 범위는 전통적인 술, 담배, 약물뿐 아니라 게임, 쇼핑, SNS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대상을 통해 저자들은 중독의 원인을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완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중독을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설명하려는 기존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다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아마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듯 싶다.
‘쥐 공원 실험’과 같은 사례를 통해 외로움과 사회적 단절이 중독을 강화한다는 점도 언급되며 회복의 조건으로는 단절보다는 연결, 단속보다는 이해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의존’과 ‘의존증’을 구분함으로써 모든 의존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을 통해 중독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감정이나 도덕의 틀로만 해석하기 쉬운 영역을 구조적 맥락 속에서 차분하게 풀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중독을 겪는 사람뿐 아니라 그 현상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기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책은 단순히 의존증을 소개하거나 설명하기만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의존증'은 알코올이나 약물뿐 아니라 도박, 게임, SNS, 폭식 등 ‘그만두고 싶지만 멈추기 어려운’ 모든 행동을 포괄한다. 이러한 정의는 의존증을 병리적 문제로만 한정짓기보다 현대인의 삶 속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의 출발점은 2022년 말 한 북토크 행사에서 두 저자가 처음 대화를 나눈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문학 연구자 요코미치 마코토의 글이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도시히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화가 전형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나 전문가 중심의 해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가 자신의 약점을 전면에 내세우며 의존을 단지 관찰하거나 분석하는 대상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솔직하게 다루고 있고, 이러한 시선이 바로 이 책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 흐르는 시선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경험 중심적이며 무엇보다 실제 생활과 맞닿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의존을 하나의 고정된 진단명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성향, 사회적 조건, 문화적 환경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유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는게 또 하나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본다. 오히려 기존의 판단 기준을 유예하고 우리가 ‘의존’이라는 현상을 얼마나 단순화해 왔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전문가와 당사자가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이 서신 교환은 의존증에 대한 시야를 확장시키며 새로운 접근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의존’과 ‘의존증’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의존 그 자체는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심리적 구조라고 강조한다. 커피, 단 음식, 사람과의 관계처럼 일상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수단들은 모두 어떤 형태의 ‘의존’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운 존재이며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저해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 대상에 집착하게 될 때, 의존은 질환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의존증’이다. 단순한 습관이나 취향의 문제를 넘어 개인의 기능적 손상과 사회적 관계의 붕괴를 초래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저자들은 이를 ‘그만두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며 특정 행위나 물질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존증의 핵심은 단순한 쾌락 추구에 있지 않다. 이 책은 ‘자기 치료 가설(Self-medication hypothesis)’을 통해 의존이 발생하는 배경을 설명한다. 사람이 무언가에 깊이 빠지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즐거워서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중독의 대상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해소 기제로 기능하며 아이러니하게도 당장은 생존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의존증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나 성격 결함으로 몰아가는 기존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치료의 대상이 되는지는 결국 문화적 규범, 사회적 기대, 개인이 처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밤새 게임을 하는 청소년은 치료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같은 시간 동안 공부를 하면 오히려 칭찬받는다. 여기에는 무엇이 ‘정상’이고 ‘이상’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저자들은 짚고 넘어간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의존증을 단순히 끊어야 할 행위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감정과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문제의 본질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그로 인해 가려진 삶의 상처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의존을 단순한 욕망의 결과나 절제력의 부재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는 중독의 본질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한 심리적 대응이며 바로 그 점에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감정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책은 인간은 본래 완전한 자립적 존재가 아니며 삶의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일깨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중독을 단속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면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환경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문제의 해결은 '억제'가 아니라 '이해'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단절이 아닌 연대와 공감이 회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존이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는 인식은 중독을 바라보는 기존의 도덕적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이 책은 단지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는지를 탐색하는 하나의 진지한 성찰로 확장된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누군가가 어떤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어떤 결핍과 아픔이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곁에 있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중독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책임이자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으로 제시하는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기댈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