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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의뢰: 너만 아는 비밀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14
김성민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8월
평점 :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조금 일찍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제4회 창비교육 성장소설 대상 수상작으로 혼자 해결하기 어렵거나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의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주인공이 다양한 사건을 겪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교, 사회, 친구 관계 등 청소년이 마주한 현실적인 고민을 생생하면서도 진지하게 담아내어 많은 공감과 울림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은 자정이 되면 새로운 사건이 게시되는 비밀스러운 온라인 공간, ‘오늘의 의뢰’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곳에서는 ‘혼자 해결하기 어렵거나, 누구에겐 말할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대가로 기회를 준다. 바로 의뢰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만이 다음 의뢰를 등록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반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영원히 사이트 이용이 금지된다. 이 규칙은 마치 게임처럼 보이는 시스템에 현실성을 더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어느 날 밤, 한 학생이 올린 충격적인 의뢰로 시작된다. 대상은 명문고 전교 1등 이진성이라는 아이다. 그 아이의 중간고사 시험을 망치게 해달라는 의뢰가 게시되자 익명의 이용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치열한 논의를 펼친다. 결국 ‘LOVEX’라는 아이디의 누군가가 임무를 수락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제시되는 ‘오늘의 의뢰’는 단순한 문제나 어려움의 해결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마주한 경쟁, 질투, 외면당한 감정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더한다. 특히 사이트의 규칙은 이용자들에게 일종의 도덕적 책임과 위험을 동시에 부여하며 독자에게도 ‘정의란 무엇인가’,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인공 해민 모녀가 사는 다세대 주택의 2층에 어느 날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온다. 바로 같은 학교로 전학 올 예정이라는 중학생 ‘강도경’과 그의 어머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반찬을 들고 2층에 올라간 해민은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도경이의 고함과 어머니의 흐느낌, 그리고 처음 듣는 남자의 낮고 거친 목소리. 반찬을 전하러 갔다가 얼떨결에 도경과 마주친 해민은, 더욱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날 이후 해민은 자꾸만 도경과의 어색했던 순간과 그날 들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도경이 강제전학을 왔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하고 모범적인 도경, 하지만 뭔가 감춰진 사연이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해민의 호기심과 걱정을 동시에 자극한다. 이처럼 이야기는 해민과 도경, 두 인물이 어색한 첫 만남과 함께 점차 서로의 삶에 엮이게 되며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또래의 진심을 어떻게 마주하게 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해민과 도경의 서툴고 풋풋한 교감과 대비되며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바로 속 깊고 야심이 넘치는 아이, 소정이다. 단정한 옷차림과 차분한 태도, 매사에 신중한 판단력으로 또래들 사이에서도 모범적인 이미지가 강한 소정은 전학 온 도경을 처음 본 순간부터 괜찮은 아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도경이 곤란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줬을 때, 이 친구와 친해져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소정에게 ‘진짜 친구’란 아무하고나 쉽게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정은 스스로를 완벽에 가깝게 관리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시험 성적, 동아리 활동, 인간관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선생님께는 모범적인 학생, 친구들에게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왔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영특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란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 속에서 인정받는 삶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제중 입시 실패라는 아픈 기억이 있고, 그 이후로는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소정에게 해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태도도 없고, 적당히 맞춰가는 듯한 자세로도 칭찬을 받는 해민이에게 은근한 불편함과 경쟁심을 느낀다. 세상은 결코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언젠가는 큰 좌절을 겪을 것이라며 냉정하게 예견하기도 한다. 이런 소정의 모습은 실제 교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지극히 현실적인 또래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에 대한 깊은 몰입을 이끈다. 이처럼 소정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이야기의 긴장과 균형을 만들어 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서 중심 인물들과 대비되는 매력을 발산한다. 소정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또래의 시선과 감정에 공감하게 되며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 속 ‘오늘의 의뢰’는 단순한 익명 채팅방이 아니라 이곳에 올라오는 사연과 의뢰는 현실 속 억울함, 분노,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생생하게 담고 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문구점에서 도둑으로 오해 받은 일화를 올리며 분노를 토로한다. 자신을 무시한 점원과 사장을 응징해 달라며 누군가 문구점 유리창을 깨뜨려 달라는 의뢰를 남긴다. 곧 채팅방의 이용자들은 의뢰의 정당성을 논의하기보다는 유리창을 어떻게 깨뜨릴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논의하며 사건은 점점 현실로 향한다. 이 장면은 독자들에게 학생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는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불법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를 생각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겠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대리 복수’는 과연 정의일까, 또 다른 폭력일까? 이렇듯 ‘오늘의 의뢰’는 스릴감과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공감과 판단 사이의 경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감정과 정의가 왜곡되는 과정을 통해 이 책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또래 간의 갈등이나 학교생활을 넘어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침묵의 폭력과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평범한 청소년의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계의 균열과 감정의 깊은 흐름, 그리고 익명성이 빚어낸 위험한 선택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 그리고 ‘해결’이라는 말이 본래 지닌 의미조차 의심하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해민과 도경은 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성장의 과정은 때로 느리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주해야 하는 감정과 책임이 있다는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책은 빠르고 손쉬운 선택을 부추기는 오늘의 사회에서, 진짜 ‘해결’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 구조와 현실을 비추는 날카로운 시선은 이 책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