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언어들 - 세포에서 우주까지, 안주현의 생명과학 이야기
안주현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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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학은 결국 생명으로 이어진다!"


띠지 속 문구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언어로 생명을 읽어내고 있다. 초파리의 신경계 발생을 연구해 온 생명과학자이자 현재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안주현 저자가 교실과 유튜브 현장에서 갈고 닦은 생활 밀착형인 40편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담아내었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이라는 전통적 교과의 경계를 허물고 '생명'이라는 관점을 중심축으로 삼아 통합적인 서술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40편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를 골라 읽을 수도 있고, 각각의 주제가 유기적으로 생명이라는 중심 개념에 연결되어 있어 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자외선으로 인한 돌연변이에서 공룡의 멸종, 안 아픈 주사와 시드볼트(종자 저장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소재들이 해시태그와 함께 정리되어 있어 과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적 사실을 단순히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으로 이어나갈지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투구계의 푸른 피를 통해 생명윤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혈압계 하나로 순환계의 과학을 자연스럽게 풀어냄으로써 교양서 이상의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안 아픈 주사’를 향한 과학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주사에 대한 두려움, 그 작고 날카로운 바늘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과학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저자는 주사기를 둘러싼 역사와 기술의 발전 그리고 고통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과학이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를 설득력 있게 담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약품 전달 수단이었던 주사기는 반복 사용으로 인한 감염 위험을 막기 위한 일회용 제품의 등장, 약물 투입량을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유리 주사기의 개발 등을 거쳐 진화해왔다. 하지만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두려움’이다. 통증에 대한 공포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백신 접종을 기피하게 만들며 예방의학의 실효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 문제를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닌 과학의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 바늘 없이 고압 분사로 약물을 체내에 침투시키는 ‘제트 인젝터’부터 통증 없이 약물을 반복 주입할 수 있는 ‘레이저 제트 주사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바늘을 피부에 접촉시키는 ‘마이크로니들’까지 다양한 기술들이 어떻게 인간의 불안을 줄이고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특히 마이크로니들은 피부의 표피층까지만 침투해 면역세포에 직접 약물을 전달할 수 있어 통증은 줄이면서 백신의 효과는 유지하는 방식으로 진화 중이다. 이처럼 고통 없이 백신을 접종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시도는 과학이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 인간 중심의 문제 해결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책은 과학을 지식의 영역이 아닌 삶과 감정이 깃든 현실 속 이야기로 끌어와 우리에게 ‘왜 과학이 중요하며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진다. 그 덕분에 주사기 하나조차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시드볼트’, 즉 종자금고에 관한 내용이다. 식물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다. 식량, 의약품, 생활 자원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기반으로서 인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 생태계 파괴, 전쟁, 질병 등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대재앙이 닥친다면 현재의 식물 자원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위기에 대비해 세계 곳곳에서 식물 종자를 장기 보존하고 있는 시설, 특히 시드볼트의 존재를 소개한다. 일반적인 종자은행이 농업이나 연구를 위해 비교적 짧은 기간 종자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시설이라면 시드볼트는 인류 문명이 붕괴된 이후를 상정한 ‘지구 최후의 날’ 대비책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저장된 종자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절대로 외부로 반출되지 않으며 인류가 멸종 위기에서 살아남을 경우 다시 식물을 재건하는 마지막 희망이 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했던 장소 인근에 위치한 이 시설은 해발 600m 지점에서 지하 46m까지 파고들어 강화 콘크리트와 내진 설계로 설계된 철통 보안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2025년 기준으로 6,000종이 넘는 식물 종자 28만 점 이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시드볼트는 일정한 온도(영하 20℃)와 습도(40% 이하)를 유지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종자의 생명력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저장소의 구조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종자의 생물학적 특성과 휴면 능력, 그리고 역사적으로 700년 된 연꽃 씨앗이 발아에 성공한 사례 등을 통해 종자가 얼마나 강인한 생명의 형태인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종자를 보관하고 있어도 그것이 자라날 ‘환경’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준다. 결국 시드볼트는 ‘종자의 저장’이라는 기술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지구 생태계의 경고이자 약속인 셈이다.


결국 이 책은 과학을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의 분류에 의해 단편적으로 흩어졌던 개념들을 하나의 생명의 이야기로 엮어서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교과서나 책 속 지식이 아니라 물방울과 거미줄, 소리와 색, 씨앗과 주사와 같이 일상 속 평범한 사물에서 시작되는 점 역시 이 책의 특색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저자가 과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삶과 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험실의 언어는 교실에서 수업이 되고 다시 대중과의 대화로 확장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그야말로 '생명의 언어들'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 줌으로써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계속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또다른 읽기를 지속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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