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의 사랑 - 소란한 세상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
최다은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란한 세상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라는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우리는 살면서 말하기, 읽기, 쓰기에는 꾸준히 집중하면서 발전시켜왔지만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하며 살아왔다. 일상에서도 교육에서도 '잘 듣는 법'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듣기는 어느새 가장 소홀한 감각이 되었고,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무관심 속에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듣기'에 집중한다. 저자인 최다은 PD는 라디오와 팟캐스트라는 소리를 매개로 한 매체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며 듣는 사람으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듣기의 본질과 가치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듣는 행위를 단순히 수용의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듣는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타인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동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곧 관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맨 처음 실린 〈듣다 보면 괜찮아져〉에서 저자는 '듣기'라는 행위가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는 감각이 아니라, 무력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내면의 능력이자 위안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 감염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에 놓인 저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듣는 것'만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도 듣기는 그 어떤 장비도 도구도 없이 작동하며 오히려 그 절대적인 수동성과 정적 속에서 더 깊은 감각을 일깨운다. 이 경험은 저자에게 듣기의 본질을 다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피아노를 배우던 유년기부터 음악을 전공하던 시절, 그리고 라디오 PD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까지, 자신의 삶은 줄곧 ‘듣는 일’과 함께해왔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많이 듣는 것이 아니라, 다시 듣고, 나누어 듣고, 천천히 음미하는 것. 저자는 이러한 듣기의 다층적인 차원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명확히 깨닫게 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듣기가 단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이며, 타인과의 연결, 자기 회복, 의미 있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튜브 영상을 2배속으로 소비하는 것이 효율로 여겨지는 시대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귀를 기울이는 일은 어쩌면 낡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그 느린 속도와 비효율 속에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타인의 감정과 취향, 말의 뉘앙스까지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 결들을 시간 들여 하나하나 살핀다. 효율을 앞세워 빠르게 판단하기 보다는, 상대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존중하며 듣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저자는 음악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같은 원칙을 고수한다.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배경 지식이나 전공 여부는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가이다. 단순한 정보보다 청자의 감각과 해석이 더 우선된다는 생각은 그의 음악 소개 방식에도 드러난다. 음악가의 이력이나 발매 연도 같은 사실들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감상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예술을 향유하는 데 있어 부담을 줄여준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반드시 사전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집중해서 듣고 보는 태도라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음악으로의 진입에 문턱을 낮춰준다고 할까. 그리고 오히려 지식의 강박이 감상의 기쁨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알면 좋지만 몰라도 괜찮다’는 태도는 그렇기에 많은 공감과 위안이 된다.


음대를 졸업하고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뒤 라디오 PD로 입사해 인기 팟캐스트까지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저자의 이력은 겉보기에 단단하고 일관된 커리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몇 줄의 성과 이면에 숨어 있는 수많은 실패와 우회, 반복된 좌절의 순간들을 고백한다. 음악을 처음 꿈꿨을 때의 부모님의 반대,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음대 입시 준비 과정, 어린 시절의 열등감, 음악가라는 꿈을 접고 언론 고시로 방향을 틀며 겪었던 불확실성과 불안까지. 그의 삶은 계획된 직선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곡선의 연속이었다. 그 자체로 이력서에선 지워지는 비효율의 기록이 하겠다.


그리고 가장 큰 위기는 귀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게 역설적으로 청각에서 찾아왔다. 바로 이명(耳鳴). 이전까지 어떤 문제든 더 노력하고 더 준비하는 방식으로 돌파해왔던 저자에게 이명은 통제와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처음이자 낯선 경험이었다. 이 소리를 지우려 했던 모든 시도는 오히려 그 소리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고, 결국 저자는 이명과 ‘싸우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로 방향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과거에는 차단하려 했던 냉장고 모터 소리, 초침 소리, 거리의 소음들이 이제는 오히려 마음을 진정시키는 저자와 ’주파수가 맞는' 소리가 된다. 냉장고 옆에서 자는 것이 더 편하다는 그의 고백은 그렇기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더 이상 없는 소리를 상상하며 고통받기보다는 지금 있는 소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렇게 저자는 ‘다시 듣는 삶’으로 회귀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난 삶에서 ‘비효율적’이라 여겨졌던 선택들이 오히려 자신을 회복시키고, 음악을 계속 사랑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였음을 받아들인다.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그 길이 아니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감각과 관계, 그리고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듣기는 본질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행위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던져 파악할 수 있는 ‘보기’와 달리, ‘듣기’는 반드시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찰나에 모든 것을 알아채는 ‘한눈’은 가능할지 몰라도, ‘한귀’에 모든 걸 듣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 음악의 한 소절, 또는 사연의 첫 문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바로 그 점에서 저자는 ‘듣는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이처럼 효율성과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이지만 오히려 비효율이야말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핵심적인 감각임을 말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말의 맥락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일상의 소음을 차단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일. 이런 ‘비효율적인 선택’들이 쌓여 결국 더 깊은 공감과 진정한 연결을 만들어낸다. 저자의 오랜 방송 경력과 삶의 경험이 녹아든 이 책은 듣는다는 단순한 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로 하려금 성과와 효율의 언어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 속에서 관계의 깊이와 감정의 온도는 오히려 느리고 손이 많이 가는 ‘비효율’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과 듣기라는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