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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클레어 풀리 지음, 이미영 옮김 / 책깃 / 2025년 5월
평점 :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사교 클럽'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이 마구 일어 읽게 된 책이다. 대체 어떤 노인들이기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일까? 제목만으로도 이미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전개가 예상되었다고 할까. 게다가 나는 가제본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책의 일부를 먼저 읽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제한된 분량이 이 책에 대한 더 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도대체 이 기운 넘치는 노인들의 사교 클럽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걸까? 그렇게 나는 또 매력 넘치는 범상치 않은 이 책의 사람들에게 폭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영국 런던의 작은 마을, 해머스미스에 위치한 낡은 주민센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70세 할머니 대프니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가능하다면 연하의 할아버지와 연애까지 해보겠다는 당찬 결심으로 주민센터의 사교 클럽에 가입한다. 하지만 첫 모임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대프니는 자신과 다른 회원들 사이에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그 어색함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 속에서 대프니는 자신이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음을 느끼고, 과거 성차별을 겪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었을 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경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현실은 그녀를 분노하게 한다. 그녀는 어느새 또 하나의 ‘경계선’ 앞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던 중, 대프니가 클럽에 들어선 바로 그날, 천장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그 사고를 계기로, 그녀는 예상치 못한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얽히게 된다. 노인, 19세 미혼부, 말을 하지 못하는 다섯 살 아이, 이민자, 경력 단절 여성 등, 각자의 상처와 사연을 지닌 이들이 이 낡은 복지관에 모여든다. 그렇게 조금씩 관계를 맺기 시작하던 어느 날, 복지관이 예산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9세의 미혼부인 지기는 만델 복지관이 없어진다면 지금의 삶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앞으로의 삶도 완전히 망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곳에 깊이 기대고 있다. 이들에게 이 복지관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버팀목, 유일한 안식처였다.과연 대프니와 이웃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인상적인 인물들이 모여 삶의 의미를 되찾아가는 유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대프니는 그녀가 소심한 리디아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나듯, 타인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리디아에게 진심 어린 격려의 말을 건네며 리디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자존감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리디아는 그 말에 힘을 얻어 자세를 곧게 펴고 자신감을 느끼며, 무엇인가 자신 안에서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그 변화가 진짜 능력의 발현인지, 아니면 단순한 혈액순환 때문인지조차 헷갈릴 만큼, 삶에 대한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다. 이렇게 이 책의 이야기의 중심에는 까칠하지만 매력적인 70세 할머니 대프니가 있다. 그녀는 단순히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연하의 남성과 연애를 꿈꾸는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 주민센터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독자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건드리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강렬한 인물로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민센터에는 정말로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이웃들이 모인다. 수상한 취미를 지닌 무명 배우 아트, 오랜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다시 나아가려는 중년 여성 리디아,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파파라치 출신 윌리엄, 뜨개질로 동네를 뒤덮는 ‘제2의 뱅크시’ 루비 할머니, 전직 트럭 운전사 출신으로 전동 스쿠터를 몰아 무법자처럼 등장하는 애나, 그리고 열아홉에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는 지기와 말을 하지 않는 다섯 살 어린이 러키, 주인을 잃고 헤매는 노견 매기까지. 이들 각자에게는 결핍이 있지만, 그 결핍이야말로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연결고리가 된다.
이들이 모이는 만델복지관은 단순한 공공시설이 아니라, 저마다의 인생을 기대고 머무는 버팀목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예산 문제로 복지관이 폐쇄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제 막 서로를 받아들이고 삶의 방향을 다시 잡아가려던 이들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공간을 지키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삶과 관곌르 지켜내기 위해 한바탕 대소동을 벌이게 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복지관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대프니는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이 책의 중심점이 된다. 그녀는 단순한 등장인물을 넘어, 이 소설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상징적 인물이며,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존재다. “곧바로 갈게요.”라는 대사 뒤에 이어지는 '맙소사. 대체 이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녀 없이 어떻게 지내왔을까?'는 대프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 잡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이제,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모두가 의지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대프니는 성별과 나이로 인한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다. 하지만 사회의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맞서며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과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그녀는 결핍을 숨기기보다 받아들이고, 삶의 후반부에도 주체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세대를 뛰어넘는 연대의 중심에 서서, 주변 인물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대프니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 곧 ‘지금 이 순간에도 늦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가장 강하게 전하는 인물이다.이토록 강렬하고도 따뜻한 에너지를 지닌 대프니에게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 또한 어느새, 그렇게 대프니와 이 책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이 책은 나이와 조건을 뛰어넘어 누구나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그리고 각자의 상처와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함께 모여 웃음을 나누고, 때로는 눈물로 위로하며 진짜 연대를 이루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남긴다. 시트콤처럼 경쾌한 전개 속에서도 노년의 삶, 소외, 우정과 공동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이답게’ 살아야 한다는 편견을 통쾌하게 뒤엎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괴팍하지만 정이 넘치는 대프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독자에게 큰 웃음과 따뜻한 위로를 동시에 선물하며 오랫동안 깊은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