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창비청소년문학 135
이라야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손에 붕대를 감으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표지 속 소녀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걸까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이 책은 표지 속 바로 그 소녀, 열일곱 살 하람이 격투기 선수라는 꿈을 찾아 낯선 한국 땅으로 건너와 벌이는 치열한 생존과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선교사인 아버지와 모든 것에 무관심한 어머니 사이에서 외롭게 자란 하람은 외투 하나 없이 추운 겨울을 홀로 견디면서 스스로의 삶에 맞선다. 그런 하람에게 손을 내미는 이웃들과 친구들의 따스한 환대는 하람을 일으켜 세워줄 뿐만 아니라, 하람의 오랜 상처를 마주할 용기를 주며 따스한 감동을 전하며 하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든다.


이 책은 시작부터 숨을 멎게 만든다. 한순간의 방심이 연속된 타격으로 이어지고, 링 위에서 쓰러진 채 겨우 숨을 몰아쉬는 격투기의 처절한 현실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되는 첫 장면은 사실 현실이 아니라 하람의 꿈이다. 그렇게 호되게 쓰러지는 악몽으로 이 책은 시작을 한다. 이 장면은 하람의 격투기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람이 외투 하나 없이 마주한 한국이 얼마나 낯설고 혹독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된다.


세 살때부터 캄보디아에서 자란 하람은 무심하고 매정한 엄마, 그리고 늘 타인을 우선시하는 선교사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약 3,500킬로미터를 날아 낯선 고향 한국으로 향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바꾸어 보겠다는 당찬 결심과는 달리 공항과 기차역은 머리속에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황량하고 춥디 추운 현실로 다가온다.


맨몸으로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열일곱 소녀 하람에게, 뜻밖의 손길들이 하나둘 다가온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얼어 죽기 싫으면 입어요"라는 말과 함께 노란색 패딩을 내민다. 체육관 관장은 등록비가 없다는 하람의 말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만 하면 된다”며 문을 열어준다. 격투기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무하와 원지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고, 재수 없는 오지라퍼쯤으로 여겼던 동네 경찰 권 경위는 필요할 때마다 조용히 하람 곁을 지켜준다. 어쩌면 소설 속 장치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하람을 향한 조건없는 온기들이 하람에게 힘을 주는 장면들은 누군가의 다정한 환대가 얼마나 큰 용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하람의 고군분투 속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그녀가 다시 스텝을 밟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외롭고 황량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작은 손길들이 모여 하나의 온기가 되며 그 온기는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온기 덕분에 하람은 혼자인 삶에 익숙해지려 애써왔지만, 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을 점점 받아들이게 된다. “씩씩한 사람도, 잘 웃는 사람도, 용감한 사람도 모두 한 점씩은 아픈 구석이 있다”는 말처럼, 하람은 자신뿐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하람에게 용기를 준 것이다. 겉으로는 씩씩하고 밝은 친구 무하와 원지, 거칠지만 따뜻한 권 경위 역시 과거의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람은 위로란 결국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데서 비롯된다는 걸 배운다.


그러나 그 모든 만남과 경험의 끝에는 늘 '엄마'가 있다. 하람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엄마를 향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스스로를 체념하는 그 감정은, 자주 결심한 ‘이제는 그만두자’는 마음마저 매번 무너지게 만든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하람은 마침내 엄마가 자신을 외면했던 진짜 이유, 그리고 부모가 외면해온 가족의 오래된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그리고 상처를 마주하게 됨으로써 하람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너무나 아플지라도 말이다.


이 책은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만은 담고 있지 않다. 상처를 애써 덮어두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얻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한 소녀의 내밀한 성장 과정을 담담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조건 없는 환대와 조용한 다정함이 자리한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온기를 건넨 노란색 패딩 한 벌, 등록비가 없어도 문을 열어준 체육관,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들이 바로 그 온기이다. 어쩌면 오지랖이라고 할 그 작은 시선과 손길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아갈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람을 지탱해 준 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일상의 틈에서 묵묵히 건네진 진심이었다. 이 책은 너무 외롭고 혼자라고 느껴질 때에도, 누군가의 작은 다정함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전한다. 그 울림은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가슴 한편에 남아, 삶의 링 위에서 흔들리는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응원처럼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