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의 필요 청색지시선 11
김지윤 지음 / 청색종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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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의 필요>, 이 독특한 제목이 먼저 나를 끌어당겼다. 피로가 필요하다니, 역설적인 이 말 속에 과연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피로는 대채 떨쳐내야할 대상이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 피로를 들여다보며 무엇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또 그 안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듯하다.

이 시집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지윤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다. 지난 2012년 <수인반점 왕선생> 이후 13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집으로, 긴 시간 동안의 사유와 문학적 탐구가 담긴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등단 이후 깊이 있는 시선과 절제된 언어로 주목받아온 시인은 시와 비평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문학적 자리를 공고히 해왔다. 이번 시집에서 더욱 확장된 사유와 밀도 높은 감각은 한 편 한 편 오랫동안 시집 안에 머물게 만든다.


표제시 <피로의 필요>에서 '피로'는 단순히 삶의 부산물이 아니라 멈추어야 할 순간을 가르쳐 주고,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게 하며 삶의 방향성을 다시 묻는 자리로 확장된다. 롤러코스터의 무한한 궤도를 따라 달려가던 우리는 결국 엔진 없는 열차처럼 멈출 수 밖에 없고, 그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이 시에서 피로는 존재의 내면을 파고드는 성찰의 도구이며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진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김지윤 시은은 "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고 사색을 위한 어두운 방을 제공하며, 삶의 다른 국면을 열어주는 중요한 고비, 생의 문장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쉼표, 그리고 질문의 시작점과 같은 거죠"라고 말한다. 이처럼 <피로의 필요>는 피로가 만들어 준 여백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피로는 단순한 소진이 아니라, 다시금 방향을 찾고자 하는 몸과 마음의 신호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헛묘>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며, 잊힌 존재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묻는다. 시작 화자는 여행책자나 역사책, 심지어 국립현충원과 전쟁기념관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공식적인 기억에서 배제도 4.3 희생자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화산송이 흙, 까마귀 울음, 바람등칡 꽃과 마삭풀 덩굴처럼 제주 속에 스며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진정한 애도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존재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발한다. "부디 눈을 뜨고 / 오랫동안 귀 기울여 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는 역사를 바로 보고 우리가 기억할 것들은 기억해야 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시는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드는 시다.

<실수>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우리가 저지리는 실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기름을 쏟고 그것을 닦으려 애쓸수록 얼룩이 번지고 바닥이 더 미끄러워지듯 우리의 실수도 지우려 할수록 다 큰 흔적을 남기곤 한다. 시인은 담담한 언어로 실수의 본질을 조용히 들어댜 보게 하며, 때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단순한 경험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포착하는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실수와 마주하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시집은 잊힌 기억과 존재를 불러내어 역사와 삶의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분단과 4.3 사건과 같은 역사적 비극을 현재로 소환하며, 애도하지 못한 존재들을 시적 언어로 복원한다. 또한 고정된 틀을 거부하고 모순과 역설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만든다. 이 시집은 기억과 사유, 애도와 시작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 그렇기에 이 시집을 읽으며 머무는 시간동안 잊혀진 삶의 조각을 되찾고, 사유의 여백 속에서 '다음 시작'을 향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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