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적격자의 차트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평점 :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당대 한국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 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으로 2021년 <SF어워드>,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예스24 독자 선정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에 선정되어 기대를 모은 연여름 작가의 신작 SF 소설이다. 상상은 금지되고 꿈은 병증이 되며 감정조차 오류로 치부되어진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무엇을 버리고 포기하였는지를 짚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2692년 8월 23일,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도 있다는 소문에 대해 두 실무자, 나오미와 이폴이 세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원리 원칙을 제대로 지켜 무결점 실무자인 세인은 나오미와 이폴이 불문명한 소문 확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경고하는데, 생애한도 유예에 대한 이야기는 모세를 통해 중재자의 1차 제안이 내려왔다고 한다. 알고보니 세인의 모세가 고장나 세인만 중재자의 1차 제안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2692년 중재도시에는 지난 일주일 사이 일어난 오류사건으로 인해 204명의 실무자가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부족해진 인구와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생애한도를 1년이나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2692년과 중재도시는 어떤 곳이고, 생애한도란 또 무엇일까. 친절하게도 이 책은 쓰여진 계기와 배경이 되는 중재도시, 그리고 중재자의 기원 등등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부적격작의 차트이며 그렇기에 기존의 차트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22세기 말 인간과 동일한 생애주기를 가진 반려동물이 '리누트'가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탄생했다. 리누트는 인간과 더욱 깊은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로 자리 잡으며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혁신적인 발명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구는 이상 기후와 다섯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큰 변화를 겪었고, 인류는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초기에는 리누트를 철저히 통제된 환경에서 기르는 것이 권장되었으나, 사회의 붕괴와 함께 많은 리누트가 자연으로 방치되었다. 자연에 풀려난 리누트들은 인간이 예측하지 못한 재앙의 워인 되었다. 그들의 배설물에서 치사율 100%에 이르는 바이러스가 발생하면서 인류는 스스로 초래한 쟁앙으로 멸종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정점인 24세기 어느 날, 오래전 멈춰 있었던 인공지능 '모세'가 전류 오작동으로 인해 우연히 재가동되게 된다. 모세는 공동 자살을 논의하던 한 무리의 인간을 발견하고 인류가 최대한 더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모세는 생존을 위해 인간 사회에 새로운 규칙을 제시했다. 한 사람당 적정한 '생애한도'를 설정하고 이 한도를 초과하면 존엄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존엄 소거'를 시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상, 꿈, 허구와 같은 비합리적인 활동을 금했으며 이를 7회 어길 경우 '부적격 소거'로 생명을 박탈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이 모든 시스템은 철저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모세는 스스로를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중재자'로 정의하며, 인간의 생존과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동시에 인간들에게는 '실무자'로서 이 시스템 속에서 복무하며 안정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중재도시'라는 새로운 사회가 구축되게 된 것이다. '중제도시'는 인간 생존을 위한 합리와 통제가 극대화된 공간으로 불확실성과 혼란을 철저히 배제했다.
인류는 다수의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인다. 이 스스템에서는 각 개인에게 정해진 생애 한도가 주어지며 이를 다 채운 후에는 존엄 소거, 즉 안락사를 통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규칙은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절받한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지만 너무나 섬뜩하다. 그 후 인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 들이고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는 요소로 간주된 상상과 꿈을 엄격히 금지했다. 인간만이 가능한 영역인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창조적인 표현이 공익의 이유로 인해 철저히 억압되는 사회라니. 게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감정조차 불필요한 갈등과 비효율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어진 사회라니. 생존을 위해 인간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라 여긴 모든 것을이 배제된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초반부에서 상세하게 설명되는 부분들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중재도시가 설정되고 난 뒤 아홉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시작된다. 27세기 생애한도가 연장되어 아무도 존엄 소거되지 않게 된 지 몇 달이 지나고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소거되는 이의 마지막 차트를 기록하는 일을 하는 세인은 낙상 사고로 입워한 환자, 레드를 만나게 된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합리적이라 여겨져 온 인공지능 모세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레드. 레드와의 만남은 세인의 내면에 깊은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처음에는 상상도 꿈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세인이었지만 레드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숨겨준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과연 세인은 레드와의 만남을 통해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인간다움이 배제된 디스포비아적 세상에서 세인은 레드를 통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지, 아니면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중재도시에 적응한 채 살아갈지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태껏 정해진 대로 순응적인 삶을 살아온 세인에게 레드는 반기를 들며 단호히 말한다. "내 최후의 차트는 아무게도 맡기지 않아. 나의 선택은 이 벽 너머로 나가는 거야." 단호하면서도 충격적인 레드의 목소리는 단순한 생존 그 자체를 넘어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상기시키며 강렬한 메세지로 가슴 속 깊숙이 자리잡는다.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이 과연 책 속 실무자들의 삶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 우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서 무작정 앞만 바라보면 달려왔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존이 아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이 던지는 이 질문들은 내 안의 깊숙한 목소리들과 질문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화두로 남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