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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1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심코 넘겼던 표지 속 그림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한참 눈길이 머물게 된다. 책의 내용을 이토록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니. 이 책을 읽기 전에 표지의 그림만 보고서 무슨 내용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어느 날 도착한 평행세계에서 '남자'로 태어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평행세계에 대해 상상해보지 않나 싶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해본적이 있었기에 오히려 더 이 책의 이야기에 폭 빠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뻔한 설정처럼 보이는 성별이 다른 평행세계에서 삶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를 고발하며, 똑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란 여자 엄주영과 남자 엄주영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주인공 주영은 엄마와 함께 것대산 끝자락에 위치한 잘 나가는 막걸리 집 옆의 가게에 산행을 마치고 배를 채우고자 들어간다. 청국장과 함께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고 난 뒤 화장실로 향한 주영. 그런데 다시 돌아온 주영의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엄마의 맞은편,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왠 남자가 앉아 있는게 아닌가. 놀란 주영과는 달리 엄마는 너무나 태연한 얼굴이다. 주영은 눈치껏 옆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곁눈질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청국장을 먹던 남자는 엄마에게 묻는다. "아빠는. 오고 있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때 놀랍게도 다부진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 M자형 탈모 그리고 숯검정 눈썹의 아버지 엄용민 씨가 들어온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왜 주영의 엄마도 아빠도 주용을 모른 척하며 엄마의 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엄마는 남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갑자기 아빠 엄용민씨가 막걸리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쇠젓가락을 들어 테이블을 내리치며 "워닝" 이라고 말하다. 워닝이란 말은 아빠 엄용민씨가 화가 나면 언제나 모녀에게 보내던 그만의 경고였다. 비웨어(beware), 커션(caution), 워닝(warning). 그 워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급하게 마신 술의 취기 때문이었을까. 주영은 잠시 잃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옆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그런데 테이블 밑에 무언가가 빼꼼 보인다. 남성용 구찌 반지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고서 주민 등록증을 꺼냈는데, 거기에는 아까 엄마가 아들이라도 불렀던 남자의 얼굴이 떡하니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이름은 바로 '엄주영'. 그것은 바로 주영이 33년간 써온 자신의 이름이었다.
같은 이름, 같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엄마와 아빠라니.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주영은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혹시 아까 등산할 때 엄마에게 했던 말이 씨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일까. 어찌어찌 막걸리 집에서 나왔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주영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방황하다 우선 지갑을 돌려 준다는 핑게로 남자 엄주영과 다시 마주하기 위해 용암지구대로 향한다 그리도 또 한번 머리를 부여잡게 되는데, 거기에는 '최은빈'이 있었다. 주영의 세계에서 최은빈은 그녀의 베스트프렌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싸움으로 한순간에 남이 되어버린 옛 친구가 경찰이 되어 있는 거다.
물론 최은빈 역시 주영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남자 엄주영은 잘 알고 있었다.은빈의 입을 통해 들은 남자 엄주영의 정체는 주영을 충격에 빠지게 한다. 남자 엄주영은 호적에 빨간 줄은 없는 사람이지만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패거리의 따까리였다. 잘 나가는 애들에게는 빌빌 기고, 망보며 기생하는 그런 존재이며 친구들의 힘이 자기 것인줄 아는 멍청이였던 거다. 그게 바로 남자로 태어난 주영의 모습이었던 거다. 똑같은 가정 환경에서 자랐는데, 남자 주영과 여자 주영의 모습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이 책의 포인트는 바로 평행세계에서 너무나 다른 남자 주영과 여자 주영의 모습이다. 남자 주영을 통해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고발하고 여자 주영을 통해 자신의 눈에 자꾸 아른거리는 엄마 배중숙씨를 위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명랑하면서도 발랄한 설재인 작가의 문장도 읽는 재미를 톡톡히 증가시킨다.
사실 주영은 그냥 기분 나쁜 꿈이었다고 생각하고서 원래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홀로 돌아가기엔 망나니와 같은 남자 염주영이 아들로 있으며,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엄마 배중숙씨가 자꾸 생각이 났다. 내 세계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딸, 자신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한 아들을 가지고 있다니, 배중숙 씨는 과연 어느 세계에서도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그래서 주영은 결심한다. 엄마를 위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 시키기로 말이다. 그리고 감히 자신의 이름을 달고서 망나니짓을 저지른 댓가도 치루게 하고 싶다. 탁구와 유도로 단련된 주영의 전완근이 불끈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이 평형 세계에서 혼자 힘으로는 무리인 일이다. 그런 주영에게 선택지는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최은빈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주영은 은빈에게 자신이 평행세계에서 왔음을 고백한다. 믿지 못하는 은빈에게 주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사는 은빈의 학창시절을 줄줄 읊는다. 장우혁에서 시작해 김동완을 거친 그녀의 유구한 덕질의 역사를 말이다. 반신반의하던 은빈은 엄마를 구하겟다는 주영의 확고한 마음에 흔들린다. 주영은 은빈과 함께 근무하는 박병옥 경사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전하며 설득한다. 마침내 살기 좋은 청주시를 만들자는 명목 아래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엄주영을 개과천선 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의 뒤를 밟던 주영과 은빈은 그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무려 띠동갑 연하인 연재와 말이다. 남자 엄주영으로 인해 한마디로 불행에 빠질 여자가 한 사람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배중숙 씨와 연재를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우선 연재부터 구하기로 한다. 연재의 절친인 다정까지 힘을 보탠 이 팀의 첫 번째 목표는 남자 엄주영 결혼 파토내기로 정해진다. 과연 주영은 은빈과 박병옥 경사와 함께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
나와의 반대의 성별로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 지는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호기심을 바탕으로하여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멈추지 않았다. 그를 기반으로 하여 평행세계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발하고 있다. 두 엄주영은 같은 부모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둘 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남자 엄주영만이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모습으로 성장한다. 여자 엄주영은 남자 엄주영과는 달리 잘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남자 엄주영으로 인해 불행해질 여자들을 구하고자 하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소설 전반에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여자 엄주영을 비롯하여 배중숙, 최은빈, 심연재, 김다정과 같은 등장인물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우리는 "나도 너랑 똑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너처럼 되지 않았어"라고 외치는 여자 엄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읽는 내내 여자 엄주영을 응원하게 만들고, 남자 엄주영도 하루 빨리 정신 차리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성별이 바뀐 평행세계라는 어쩌면 뻔한 설정이 오히려 더 기발한 상상력처럼 다가오는 것도 이 책 전반에 깔린 적절히 발랄하고 명랑한 문체와 빠른 이야기 전개로 더더욱 이야기 속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설재인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왠지 막걸리 집 여자 화장실에 가게 되면 나도 혹시!!? 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 이 책, 생각보다 훨씬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