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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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정세랑 작가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고 할까. 정세랑 작가의 에세이가 발간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예약까지 걸어놓고 기다렸던 책인지라 읽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비로소 정세랑 월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느낌이랄까. 이 책을 통해 정세랑 작가에 대한 팬심은 더 굳어졌으며 인간 정세랑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에 대한 행복의 전율을 마구 느끼면서 정말 아껴가며 읽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아껴 먹는 아이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그녀를 알아간다는 게 이토록 큰 행복이라니.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완전 추천하고, 그렇지 않고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모른다 할지라도 문장 하나 하나에 그녀만의 따스함과 다정함이 듬뿍 담겨서 좋아도 너무 좋다.


어쩌다가 여행 에세이를 9년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종종 소설보다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이 재밌다는 말을 들어서 에세이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달랐다. 쓰다가 멈추고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고치면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 지난 여행의 기록들은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는 여행을 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멀리 가서 맞닥뜨린,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을 마음속 거름망에 걸러내 정리해두고 싶었다. p8

이 책은 정세랑 작가의 첫번째 에세이로 친구의 도시를 걸으면서 정세랑작가가 만난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정세랑 작가는 여행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뉴욕까지 날아가게 되고, 남자친구를 따라 독일에도 가게 되고, 이벤트에 당첨되어 런던에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여행기가 무려 9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누구나 여행을 그리워하는 지금 이 때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정세랑의 소설들이, 정세랑이라는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고 만들었는지 '정세랑 월드'에 관한 숨은 비밀과 같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정세랑 월드의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참 좋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투덜대면서도 결국에는 좋아하는 그 조각 조각과 같은 순간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담아놓은 사랑스러운 지구 여행객, 정세랑 작가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서 읽는 내내 나도 그녀처럼 다정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돼'와 '무슨 소리야'가 수십 번쯤 오가는 동안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메신저에서 네 번쯤 싸운 것 같다. 실제 대화에선 물음표와 느낌표가 훨씬 많았다. 눈싸움하는 아이들이 눈 뭉치를 던지는 것처럼 물음표와 느낌표를 수십 개 주고받았고, 따지고 보면 서로를 위한 대립이었는데도 꽤 뜨거운 설전이 되고 되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L의 집에서 그렇게 길게 지내는 것은 민폐인 것 같아 이기고 싶었는데, 관계의 주도권이 L에게 있다 보니 끝내 졌다. 숙소 예약을 강행하면 L이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아서 마지막 순간에 포기한 것이다. 지고도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맞는 것 같은데 왜 졌지? 친구야, 너는 정말 멋진 아이지만 이상한 데서 격하게 고집이 세구나....... 어쨌든 많이 보고 싶었으므로 여행을 크게 즐기지 않으면서도 뉴욕까지 날아갔다. 웬만큼만 가까운 친구라면 스리슬쩍 변명하고 가지 않았을텐데, 누군가를 좋아하면 확실히 무리하게 된다. 아끼는 마음의 척도를 얼마나 무리하느냐로 정할 수 있지 않을까? p12

친구 L을 만나기 위해 어디에서 머물 것인지에 대해 몇번이나 싸웠다는 정세랑 작가의 고백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저자와 친구가 얼마나 서로를 아끼는지가 보이는 장면 같아서 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척도는 얼마나 무리하느냐로 정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저자의 말에 완전 동감을 표하고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어떤 장애와 무리 따위는 보이지 조차 않더라.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생각나서 그냥 아무것도 생각치 않고 무리하게 그냥 마구 달려가던 그 순간의 그 설레임과 그 무모함이 나는 참 좋다.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삶의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스물아홉 살의 내가 몰랐던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잇다 사랑 때문이었다. 천 부도 겨우 팔렸지만 그때도 강렬하게 지지해주는 독자분들이 계셨다. 책 한 권 없이 몇 편의 단편뿐이었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해주시던 분들이...... 독자와 작가 사이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도 달랐다. 어떨 때는 커다란 방패고, 또 어떨 때는 완전연소하는 연료라서 한번 경험하면 다시는 그것 없이 살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선택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 의기양양하실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p21~p22

이 책의 날개에는 유명인의 추천사가 아니라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들의 추천사가 실려져 있다. 정세랑 작가하면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바로 '독자들이 만든 작가'다. 정세랑 작가를 향한 독자들의 사랑은 각별하다고 할까. 나 또한 그 독자 중에 한 명이길 희망한다. 비록 조금은 늦게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정세랑 작가를 향한 팬심은 누구보다 깊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제는 저자가 살아남기를 떠나 유퀴즈에도 나오는 국민 작가가 되셔서 너무 흐뭇하고 좋다.


C와 사흘 연달아 만나서 좋았는데, 그날 밤 마음이 헛헛해지고 말았다. 역시 초능력을 얻는다면 순간 이동이 좋겠다. 친구들이 있는 도시의 커피 체인점에서 한 시간씩만 만나고 올 수 있도록. 그래도 며칠에 한번 씩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서로의 안녕을 바라고 감미로운 잠과 이어질 다음 날을 기원해주는 사이인 것만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다. p290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홀로 떨어져있다. 물론 남편과 아이들이 내 곁을 충만히 지키고 있지만, 가끔은 친구들이 무척이나 보고싶고 그리운 순간들이 있다. 그럴때 정세랑 작가의 말처럼 나에게도 초능력이 허락되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해본다. 한 시간씩만이라도 그녀들을 한 명씩 만나 커피 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듯 싶다. 그래도 이렇게 물리적인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늘 전화와 카톡, 문자로 서로의 안녕을 빌어 줄 수 있어 다행이다. 나를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그녀들이 있기에 나도 하루 하루를 나아갈 수 있음이 감사하다.


서로 평소 궁금하던 거리를 함께 걷곤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한참을 만나지 못하고 있어 애틋하다. 만나고 싶은 마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길고 어두운 시기를 지낼 각오를 한다. 오래전의 여행을 꺼내어 보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고 누려왔는지 새삼스럽다. 쑥스럽지만 어떤 날,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짧은 낮과 길게 붙잡았던 밤이 나를 구했다고 C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 p292

나를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라서 우리가 함께 빛날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은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줄 몰랐다. 지나고 나서야 내가 그녀로 인해 빛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그녀의 소중함이 더 깊어진다. 그렇게 인간은 지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이다. 오늘도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잘 다스려 본다. 기나긴 이 어둠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한달음에 그녀에게로 가서 그녀와의 시간들이 나를 버티게 하였다고, 그녀가 전해준 그 밟음이 혼자인 나를 웃게 만들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 때까지 잘 견뎌보자. 우리.


이 책을 통해 정세랑 작가가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정한 시선을 건네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가 계속 되기를, 이 어둠의 시간을 모두가 무사히 지나길 바라는 지구 구석구석 모든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그녀의 다정한 사랑이 읽는 내내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형편없는 사진이라고 말하지만 책 사이 사이의 정세랑 작가 시선으로 바라보고 찍은 사진들이 무엇보다 좋았다. 따스함이 가득 담기고, 다정함이 붙어있는 그녀만의 사진을 함께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렇게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힘을 내어본다. 오늘을 버터낼 힘을, 그리고 내일을 맞이할 힘과 용기를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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