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문학동네 시인선 60
강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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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죽었다.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다음 생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내가 저승으로 갈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귀신이 되었고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귀신은 죽은 존재인가, 살아있는 존재인가.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많은데, 물에 떨어지다가도 하늘로 솟구치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되다가 어느 여인의 음부로 들어가는 생명이기도 하는데, 이는 내가 귀신이기에 보이는 풍경인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오늘 살았다. 살아서 귀신이 되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다음 생을 포기했다. 포기해서 전생을 되짚기로 한다. 도깨비불이 되어,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슴이 되어,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맹렬하게 추격하기로 한다. 나는 여인의 음부를 찢고 나오는 귀신, 그대 앞에 선 허여멀건한 도깨비불. 유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라오. 불길은 거세지고 날카로운 파편은 살을 찢으며 고통을 보인다. 살아 있기에 고통은 더욱 끔찍하고 현실은 잔혹하다. 나는 어느 숲으로 가고 싶다. 고통 받지 않고 내 삶을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나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최초의 책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나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세상에 서 있다. 나는 그곳에서 오르페우스를 만났다.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는 나와 같은 귀신이 되어버렸다. 그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향했다.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건네받고,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절대 돌아보지 않는 조건'으로 저승을 빠져나가게 되었지만 그만 그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말았다. 무엇이 그를 돌아보게 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때 무언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도깨비불과 같은 것.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이 에우리디케의 손이 아닐지도 모른단 불신. 결국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죽음'을 맞딱뜨렸고 그 결과 '살아있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살아있으며 죽어있었고 죽었으면서도 살아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에우리디케는 하얀 꽃 같은 사슴이었는데, 사슴이 불길에 휩싸여 죽고만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명계로 끌려가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영혼을 죽게 하였고, 후에 트라키아 여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그의 육신을 죽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잃었는가. 무엇을 잃어 귀신이 되어야만 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몰라 헤맨다. 물가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어느 나무 아래로 가보기도 한다. 창가에 가서 어느 여인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서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 귀신이 된 내가 한 행동. 나는 누군가를 잃었기에 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선명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릴 듯 흐려진단 말인가.

 

어쩌면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최초의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죽음에 의연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귀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 몸을 흐리게 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귀신이 된 나는, 아니, 우리는, 아니, 그들은, 귀신이 되면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살아있기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물위에서의 정지

 

날아오르기 직전일 수도

떨어져내리기 직전일 수도 있다

 

나는 물을 보고 있었다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가라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사이의 정물이 되어 있었다

 

물 표면에 뜬 그림자가 움직인다

 

지나가는 것일 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내가 움직일 때

그림자는 고요히 멎은 채

어느 먼 곳의 파도 소리를 이끌고

물위에 뜬 작은 꽃잎들의 일상 속에서 지분댄다

 

물위에서 멎은 것과

물속응로 움직이는 것 들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깨알 같은 총성

물방울들의 내밀한 화간

 

죽어가는 순간일 수도

다시 깨어 다른 물체가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바람은 꽃잎에 내려앉아 투명한 옷을 벗는다

 

꽃이 꽃이라 불리기 전에 태어났던 물고기들이

허공에 멎은 나를 본다

 

그림자는 그물처럼 물위를 휘저어

물고기 잇자국 명료한 그날의 해골을 건져올린다

 

웃고 있는 흰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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