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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원제 지음 / 불광출판사 / 2019년 11월
평점 :
세상이 가짜 같아 삶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던 스님은 진리를 위해 살겠노라 결심을 하고 출가하게 되었다 한다.
선원에서의 수행은 녹록지 않았고, '세계 일주나 가자!'며 2년여간 티베트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으로 세계 일주를 다니며 수행을 계속 이어나가셨단다.
자신을 땡중이라 부르는 원제 스님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그냥저냥 쉬는 듯 노는 듯 '중놀이'하며 지내고 계시단다.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에서 스님은 '사람과 세상은 이미 그대로 답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릇된 질문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스스로 답이 된다'는 그 말씀이 어렵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솔직히 책을 통해 하시는 수많은 말씀들이 좋은 말씀인 건 알겠지만 알듯 말듯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라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다가 <판단중지>란 글을 읽었다.
내가 모른다고, 혹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모를 뿐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지, 상대방이 틀렸다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 크게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공부할 기회를 놓칩니다. 내가 살아갈 기회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P. 134)
스님도 출가하기 전 대학생 시절에 숭산 스님의 책을 읽으며 도무지 모르는 것 투성이라 답답했고 궁금증만 점점 더 커져갔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거나 다른 해석을 봐도 이 궁금증은 근원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아 그렇게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고 수행을 통해 스스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셨단다.
우리는 보통 내가 모르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교의 선(禪)을 대하는 데 다소 이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본인에게 이해되지 않기에 부정해버리거나 의미를 격하시켜버립니다. 선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논리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선이 천년 넘게 지속되어 온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말장난이거나 거짓이었다면 결코 천 년을 이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략)
이 선 공부의 요체는 의심입니다. 이 의심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선 공부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종류의 의문을 품지만, 그것을 끝까지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의심을 계속 이어가기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선을 부정하거나 의미를 격하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성향을 보면 이 의심에 머무르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의문이나 의심이 아닌 '답'입니다. 선의 역사에서 그 어떤 법거량(선에 대해 주고받는 문답)을 보더라도 어떤 논리와 이치로 답을 도출해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문만 생길 뿐입니다. 모든 법거량은 의심을 위해서 생겨난 하나의 장치이지, 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이어지고 깊어질수록, 그래서 의심밖에 남지 않아 의심과 하나가 될 때에야 비로소 그 모든 의문이 무너지게 됩니다. 답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의문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의문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P. 135-136)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답을 구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의심하는 삶입니다. 답을 구하려는 삶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구한 것들을 축적합니다. 축적한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의심하는 삶은 축적된 것들을 돌이켜보고, 의심되는 것들을 비워갑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자리를 돌이켜봅니다. 그리하여 두 삶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구하는 삶은 여전히 밖을 향해 나서게 되고, 의심하는 삶은 곧장 그 자리에서 멈춰지게 됩니다. 답이란 결코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춤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함이 멈춤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37쪽)
사람들은 아는 만큼의 삶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것을 끝없이 넓히려고 애쓴다.
스님은 아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다고 하셨다.
책을 통해 삶에 대한 모든 의문을 꿰뚫어보는 '본질적인 앎'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책 또한 그 앎에 대한 스님의 수행 기록이라 하셨다.
책의 마지막 날개에는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사는 법'을 알려주는 '원제 스님의 킬링 법문 8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1. 꼭 삶의 의미가 근사해야 할까
2. 무엇이든 의심하기
3. 자신이 의지하는 등불을 꺼라
4. 판단 중지
5. 과거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라
6. 문제는 없다. 상황이 있을 뿐
7. '나'는 이겨서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다
8. 행복만을 선택하지 마라
세상에만 속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속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의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며 나의 존재와 생각 자체를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자신이 의지하고 믿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는 어떤 가치와 믿음에서도 벗어나야 하며,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등불을 꺼버릴 때 비로소 원래 있던 환한 달빛이 나오게 되면서 전체로서의 삶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셨다.
과거에 집착해 현재를 불행하게 사는 것도 피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들만 선택하려는 것도 멈추라고 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허용해 줄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면 기쁨도 우울도, 어두운 생각도, 분노도 그 모든 게 진리로서 드러나게 되어있다고 했다.
킬링 법문을 말씀하시지만 결국엔 힐링 법문이 되는 좋은 말씀이다.
수없이 되새기며 기억해야 할 말씀인데 정작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아쉽고 안타까워 이불킥하게 되는 상황도 더러 생기는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쿵쾅거리는 윗집의 층간 소음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곁에 두고 마음공부를 위해 수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나에게만 갇혀 산다면 사람이나 세상은 상대해야 할 의문투성이겠지만,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사람이나 세상은 그대로 온전한 답입니다.
(P. 8)
세상에 여러 삶이 있는 것뿐 아니라, 단 한 개인에게도 다양한 삶의 모습과 역할이 있습니다.
답을 정해서 고정시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답은 다채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어느 한 역할에만 머무르려 고집하지 않는다면 동시에 여러 역할들도 아무런 걸림 없이 원만하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고정된 실체란 없습니다.
실체화라는 망념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로 향한 편중된 집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그릇된 질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람과 세상은 이미 그대로 답입니다.
질문한다면 고민이겠지만, 답이기에 누리는 것이고, 확인하는 것이고, 누리는 것이고, 써먹는 것입니다.
답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된 질문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답으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P. 9)
<니 얘기>
절집에서 큰스님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경전에 나오는 말이고..., 그거 말고 니 얘기를 해봐, 니 얘기,"
(P. 59)
원제 스님은 경전 공부를 많이 하고 수행을 잘 해나가 불교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달변이 된다 해도, 자기 눈앞의 삶이 진리로서 펼쳐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큰스님들은 ' 니 얘기'를 묻는 것이란다.
불교를 잘 알고 조사의 뜻을 잘 꿰고 있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의 삶과 경험이 진리로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헛똑똑이의 삶이라고 하셨다.
정말로 두려움이 없다면, 자신의 삶으로 거침없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니 얘기'라고 말씀하신다.
<존재 이유>
사람은 존재 이유를 찾는다.
그래서 '대상'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나의 가치가 증명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충만하지 못하니까 그 결핍감에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매고, 결핍감을 채워 줄 대상을 찾아다닌다.
결국 변화하는 대상에 내 마음도 수시로 변화하면서 대상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본래 주인인 나를 버리고, 대상의 객으로 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방천지로 치구(말을 타고 내달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쏘다님) 하는 마음을 멈춰야 합니다.
멈추지 않고는 절대로 안 됩니다.
멈춰야만 비로소 보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더 이상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존재 그 자체입니다.
존재로서 그렇게 환하게, 분명하게, 자유롭게, 텅 비게, 충만하게 있는 겁니다.
애초부터 무얼 그렇게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P. 62-63)
<스승은 있다>
그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비울 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본래 자연스럽게 있는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스승도, 선지식도, 부처도 찾아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열리면 새로운 안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중략)
내 안목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게 됩니다.
그러한 동시에 못난 모습만을 보아 왔던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갇혀 살 때는 모릅니다.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간 갇혀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입니다.
(중략) 세상에 수많은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세상이 있고, 그 세상만큼 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개인과 개인의 사소한 만남이 나이라 서로 다른 세상과 우주의 거대한 조우인 셈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딱 그만큼만,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을 평가합니다.
이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만일 내가 보는 사람과 세상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사실 그건 내가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제대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은 신가요
그럼 비우십시오,
비운만큼 사람과 세상은 새롭게 열립니다.
(P. 87-88)
<킬링 법문>
스님이 힐링 법문보다는 킬링 법문을 주로 하게 된 이유는 '선(禪)'이라는 공부 방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초기 경전으로 공부를 하면서도, 어록을 보면서 줄곧 공부를 했는데 그 이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의심이 들었고, 집중이 되었기 때문이었단다.
비교적 이해가 잘 되던 초기 경전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더 큰 관심이 갔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오히려 더 큰 알 수 없는 믿음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의심의 속성은 '킬링'입니다.
눈앞의 감각 대상과 경험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며, 거리를 두는 것이고 속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체화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그 얼마나 강력한 중심이며 끈질긴 집착인가요.
나 역시도 포함되는 그 모든 대상들과 감각들에 대한 실체화에서 벗어날 적에 우리는 비로소 눈앞이라는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앞도 뒤도 없는 그러한 전체로서의 눈앞입니다.
의심이라는 수행은 나와 대상과 감각, 생각들에 대한 집착을 킬링 하는 것이지만 그 킬링이 무르익으면 종국에는 결코 킬링 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눈앞이 자연스레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허공 같은 눈앞입니다.
그 누가 허공을 벨 수 있으며, 허공을 태울 수 있겠습니까.
의심이라는 수행은 이런 것입니다.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한 집착을 킬링 하는 것이 의심이지만, 결코 킬링 할 수 없는 전체를 살려내는 것이 바로 의심입니다.
대상들을 죽이지만 전체를 살립니다.
킬링이지만 동시에 힐링입니다.
대사각활, 크게 죽는 동시에 제대로 살아나는 입니다.
(P. 10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