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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디 여행 사전 - 여행의 기억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
임요희 지음 / 파람북 / 2019년 12월
평점 :
여행기자로 일하면서 소위 명소하고 하는 곳만 취재하다 보니 남다름에 목이 말랐다는 저자 임요희는 남 들이 안 가본 곳, 남들이 안 찍은 것을 찍고 싶었으나 한정된 취재 일정 속에서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고 한다.
"특별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특별함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때부터 신비로운 컬러 '버건디 Burgundy'에 매료되어 버건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고 <버건디 여행 사전>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하나의 컬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저자 스스로도 버건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파랑새를 찾는 일만큼 무모한 여정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버건디 Burgundy의 사전적 의미는 프랑스 남동부 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적포도주를 뜻하다 보니 흔히 와인색이라 부르기도 한다.
약간 청색 기미가 있는 적색으로 1915년경부터 색명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자주색 또는 팥죽색으로 불리는 칙칙한 빨강 색이다.
성서에서 와인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데 피는 생명이자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인간 내면의 끔찍한 열정인 '광기'를 나타내는 색이기도 한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색, 원초적이면서 세련된 색, 귀족스러우면서 신비로운 색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 입으면 촌스러움의 끝을 볼 수 있는 색으로 꽤나 까다로운 색이다.
하지만 버건디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세계적인 셀럽들이 사랑하는 색이며, 세계적인 명차들도 빠짐없이 버건디 에디션을 선보일 만큼 디자인 퀄리티가 바탕이 되었을 때 빛을 발하는 색이다.
일곱 빛깔 무지개 속에서 굳이 버건디의 자리를 찾아보자면 빨강과 보라 사이쯤 될까?
버건디는 무지개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색, 신만이 볼 수 있는 색, 의망 그 이상을 상상하게 하는 색으로 부구에게도 닿지 않았으므로 버건디는 미지의 색이다. ( 8P )
저자는 '진짜 버건디'를 본 적이 없으며, 그저 버건디를 모방한 색 속에서 버건디의 느낌만을 상상할 뿐이라 더욱 버건디에 매혹되는 것 같다고 했다.
여행 에세이 <버건디 여행 사전>에는 버건디에 얽힌 50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도 좋고, 마음에 드는 지면을 펼쳐 읽어도 좋고, 거꾸로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해도 전혀 낯설거나 어색함 없이 작가의 사색을 따라갈 수 있다.
특별한 곳으로 떠나는 여행에서든 가까운 곳에서 특별함을 찾는 방법 중 하나로 나만의 색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생각해낸 것이다.
물론 색깔이 아니어도 좋다.
나만의 주제를 정해 나만의 여행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산행을 좋아하면 등산을 위주로, 걷기를 좋아하면 둘레길을, 빵과 커피를 좋아하면 카페 투어를, 사찰 기행, 성지순례, 전국 또는 전 세계에 있는 등대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것 같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남들이 본 것만 보고, 남들이 먹는 것만 먹고, 남들이 찍는 것만 찍지 말고 나만의 특별한 여행을 계획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각 장의 말미에는 지면에서보다 구체적인 여행 정보를 담은 '여행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알찬 여행정보도 제공해준다.
첫 번째 버건디 여행의 주제는 고무 대야다.
일명 '고무 다라이'라 불리던 지금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 물건을 예전엔 집집마다 물을 한가득 담아놓았던 집안의 식수원이기도 했고, 널찍하게 타원형을 뽐내던 최대 빅 사이즈의 고무 대야는 내 생애 첫 프라이빗 수영장이기도 했다.
이불 빨래라도 하는 날이면 몽글몽글 비누거품을 발로 밟으며 웬만한 댄스 못지않은 춤 실력을 뽐낼 수도 있었다.
이젠 도시에서는 보기 귀한 물건이 되었지만 버건디 컬러의 강렬함을 기억하기에 고무 다라이만한게 없는 듯하다.
버건디 롤러스케이트의 글을 읽으며 저자의 연령대를 대충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바퀴가 자동차 바퀴처럼 좌우로 두 개씩 나눠 있는 롤러스케이트는 제법 안정감이 있어 누구나 쉽게 탈 수 있었고 타원형의 트랙을 속도감 있게 돌며 경쾌한 팝송을 듣는 건 어린 시절 즐거운 놀이 중 하나였는데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롤러장에 놀러 가는 게 무섭기도 했다.
동네에서 좀 논다는 언니 오빠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라 출입을 금지하는 학교가 대부분이었고, 불량 스포츠로 낙인찍힌 암울한 시대였다.
요즘 유행하는 복고 감성을 표방하는 롤러장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데 전체 이용 가능한 건전한 레저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어 아이들과 한 번씩 신나게 즐기기 좋은 곳인 듯하다.
참, 롤러스케이트와 버건디는 무슨 상관이 있냐 싶을 텐데, 예전 롤러스케이트 신발이 대부분 버건디 컬러였다.
다양해진 여행 콘셉트 중 다크투어가 유행이다.
역사 교훈 여행, 부끄러운 역사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말하는데, 폴란드에 홀로코스트가 있다면 서울에는 남영역 인근의 전 경찰청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있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해양연수소'라는 위장 간판 아래 보안사범과 민주인사를 잡아들여 고문하던 곳이다.
영화 <1987>에서 87학번 연희가 삼촌을 찾으러 나선 곳도 이곳이었고, 소설 <붉은 방>에서 오기섭이 갇혀 있던 곳도 이곳이었다.
이근안이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곳도 이곳이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 받아 숨진 방도 이곳에 있다.
그가 숨을 거둔 대공분실 509호는 지금 시민에게 개방 중이다.
비록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봐야 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주황색 타일에 둘러싸인 욕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는 이 주황색 타일이 보다 음험하고 침침한 버건디 타일로 표현되었다. (64P)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진 다크 투어 여행지로 현 남산 '문학의 집' 자리에는 '중앙정보부'가 존재했다.
중앙정보부 '중정 6국'은 군부독재 시절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통했는데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명칭이 바뀐 뒤에도 이 건물 지하에서는 민주화 운동가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되었던 곳이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이곳에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인권 유린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철 구조물 중에는 버건디 컬러를 지닌 구조물이 많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벨기에 안트베르펜 중앙역, 파리의 에펠탑이 대표적이다.
에펠탑은 처음 제작될 당시에는 버건디 컬러였는데, 그 이유는 녹을 방지하는 방청도료의 원료가 붉은빛을 띠기 때문이었다.
적연(Red lead)은 납을 공기 중에서 400도 이상 가열해 만든 붉은빛 금속 가루인데, 같은 버건디 계열의 방청 안료인 산화철을 혼합하면 견고한 방청도료로 재탄생된다고 한다.
1889년 준공 당시 버건디로 선보인 에펠탑은 색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1968년부터는 '에펠탑 브라운'으로 고정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버건디 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와인, 뱅쇼, 다양한 베리류와 자몽, 사과, 버건디 우체통, 단풍, 크리스마스, 홍차, 티타임, 그리고 팥죽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저자의 글과 함께 버건디 컬러의 세계로 떠나는 색다른 여행을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