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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 - 58일간의 좌충우돌 자전거 미국 횡단기
엘리너 데이비스 지음, 임슬애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인의 이야기다.
느즈막한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후 코리안타운에서 유통 배달업을 시작했다.
이후 친적의 도움으로 대형 컨테이너 보조 운전사로 채용되어 미국을 횡단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캐나다의 뒤를 이어 세계 3위의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횡단하다보면
사계절을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6,000마일 약9,600km를 달리는 길 위에서는 여정이 어찌 편안하고 수월하겠는가만은
매 순간 달라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단함도 잊는다고 했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렇게 넗은 땅덩어리를 차로 달려보며 어떤 기분이 들까..
도로 정체따윈 없는 쭉 뻗은 길을 하루 종일 달려보면 지독한 해방감을 느낄수 있을까..
그런데 차가 아닌 자전거로 미국 횡단길에 나선 어느 용감무쌍한 여인의 이야기에 솔깃해졌다.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읽기도 전에
솔직히 랜스 암스트롱과 같은 자전거 영웅의 무용담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요란한 책표지와 거칠지만 대담한 일러스트, 한국어임에도 읽기 어려운 악필에 가까운 글씨체
를 보는 순간 이 책의 정체는 뭐지? 라는 생각을 했다.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글이 너무 적고 만화책이라고 하기에는 글이 많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58일간 좌충우돌하며 2736km를 달린
엘리너 데이비스라는 작가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만화겸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녀는 2009년 가장 뛰어난 신인 만화가에게 주어지는 러스매닝상 수상을 필두로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그녀의 그림은 이쁜 구석이 하나 없지만 덕분에 군더더기가 없다.
딱 필요한 만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림 옆의 한글은 저자의 요청에 의해 원서와 동일하게 모두 손글씨로 작성했다고 한다.
타이핑 문화인 미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악필인 것까지 고려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맞춰 적었지 않았을까 싶다.
(이참에 그녀가 쓴 원본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친김에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음..생각보다 글씨체가 또박또박하다.
그림도 글씨도 눈에 익자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
DAY1, 3월 16일 부모님 댁이 있는 투손에서 벤슨까지
자전거로 달리기로 결심한 엘리너는 DAY58 5월 3일까지
무려 58일간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혼자, 불법체류자와 탈영범이 우글거리는 사막에서 야영을 하고,
시큰거리고 삐걱거리는 무릎에 침을 맞아가며 달리고 또 달린다.
무작정 달린다.
달리다보니 미칠듯이 힘들어서 뒤돌아보니 제법 높은 산길을 올라오고 있던 적도 있었고,
폐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숲의 터널을 달릴때도 있었다.
여기를 둘러봐도 수평선, 저기를 둘러봐도 수평선이 펼쳐진 곳도 있었다.
그녀가 일주일째 죽어라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도착한 파라다이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부모님께서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 보러오셨다.
일주일 동안 죽자 사자 달려왔건만 부모님은 10번 주간고속도로를 타고 직선으로 왔더니
3시간 걸리더라 하신다. 순간 빵 웃음이 터졌다.
자.. 이쯤해서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걸까..
'자전거 여행을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사람들의 궁금증 어린 질문에 때에 따라 적당히 답을 한다.
매사 심하게 진지하지 않아서 좋고, 유쾌하고 대담해서 좋다.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터프한 그림체도 발랄하다.
덕분에 2736km동안의 여정을 함께 한 독자들은 힘들고 괴롭다기 보다는
길위에 펼쳐진 풍경들과 사건 사고들과 여러 에피소드에 즐거워하고
그리고 길위에서 만난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친절을 깊숙히 느끼며 찐한 여운을 맛볼 수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남편, 부모님의 존재와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곱씹으며 감사와 그리움을 곱씹으며 페달을 밟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완주를 했을까.
결론을 말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마지막 960km는 깨끗하게 포기한다.
아!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기분이 참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포기를 하락하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녀는 시작도,포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시작해야 할때 주저하지 않고,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할 줄 아는 그녀는 참 멋지다.
오히려 끝까지 완주하겠다고 무리에 무리를 해서 몸을 망치는 것보다
포기해야 할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이 더 용기있는 결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꽁무니에 붙어서 연신 페달을 밟으며 미국 횡단을 함께했다.
(함께 한 기분이다)
그녀와의 라이딩은 시작부터 참 즐거웠다.
내 무릎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고, 광활한 사막도 함께 지나고,
깊은 산속 산짐승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텐트안에서 잠도 청했고
폭우로 홍수가 된 거리를 첨벙거리며 무거운 자전거를 끌며 걷는것같다.
글보다 좀 더 리얼했던 그녀의 그림의 묘미를 제대로 느껴보았다.
또한 낯선 여행자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나눠주고 쉴자리를 내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따스함이 감동으로 느껴졌다. 멋들어진 경치보다 더 감동으로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즐겁고 유쾌하고 낭만적이지만 찌질하고 힘들고 외롭기도 했던 여행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매일매일을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듯한 우리들은 바쁜 일상은
우리를 쉬이 지치게 한다.
복잡한건 NO, 단순한건 YES 라고 소리치고 싶을때가 많다.
이런 저런 잡생각없이, 무식하고 단순하게 아무 생각없이 오로지 이것!만 했음 좋겠다라고
생각날때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밟아보거나, 부릉부릉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보면 어떨까..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두 발로 걸어봐도 좋겠다.
엘리너 데이비스처럼! 아무 생각없이! 털털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야만 비로소 느껴지고 볼 수 있는 것을 찾으러 그렇게 나서고 싶어진다.
저 멀리 보이는 산
기자 저곳으로
그 산을 오르고
마침내 고지를 넘으면
지나간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