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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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위 말하는 '영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대중 매체 중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TV(프로그램, cf)와 컴퓨터(internet)인데, 이것들은 영상으로 메시지와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무수한 동영상과 배너 광고들, 플래시 만화, 웹 디자인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나도 컴퓨터, 인터넷을 자주 이용하는 네티즌 중 한 사람으로, 하루에도 수십 개가 넘는 사진과 그림과 이미지 광고 등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은 작품성 혹은 예술성보다는 실용성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합성 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무수히 접하더라도 미적 감각을 채워 줄 만한 것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던중, 책으로 접하게 된 많은 그림들. 물론, 미술 작품에 관심이 좀 있어서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그림과 그 설명을 본 적도 많다. 그러나 책으로 넘겨본 '그림 읽어주는 여자2'의 그림들은 안정감이 있었고 작품 감상에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국내 화가들의 작품들은 이제까지 서구화되고 있었던 미적 안목에 균형을 잡히게 해 주었다. 서양화라고 하더라도 그 기법으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획득해서 은은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파스텔 톤의 예쁜 소품같아 보이는 그림도 다수 보였는데, 처음 볼 때에는 그냥 보기에 좋다, 예쁘다 등의 이유로 인상에 남았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유행에 맞추어 작품성이나 예술성보다 시각의 즐거움만 주려는 의도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억측일 수도 있다.

화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고 고뇌하여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서정적인 시 모음집이나 연애시·사랑시 시집 표지나 삽화에 들어있는 그림들.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고 부드럽게 하여 판매량을 늘리려는 것처럼 보여서 그림가지 상업성이 짙게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의 작자 한젬마는 그것을 경계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반 대중이 좀더 그림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생활화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미술 분야를 친숙하게 느끼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에 호감을 갖고는 있으나, 아직 제대로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림 감상 입문용으로 쓰이거나 아니면, 부드러운 커피·홍차를 곁들여 눈요기식으로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으로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이 어렵지 않고 편안하고 깔끔하게 편집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린 글도 독자의 이해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작자 자신의 에세이라서 부담도 없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텍스트 위주의 책만을 주로 접해왔던 나에게는 이 책이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다. 소설이나 시, 학술 교양 서적들도 상상력과 연상력을 키울 수 있고 지식을 늘리게도 해 주지만, 그림·예술(미술)작품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좀더 자유롭고 상대적인 그림 감상. 그것을 표현해낸 화가들에 대한 호기심. 표현 기법과 경향,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 특히 그림·사진은 이미지 정보라서 상상력과 연상력을 키우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눈이 즐거운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내가 비교적 많이 알고 있는 화가로는 고흐, 클림트, 이중섭 등이다. 지금은 '달과 6펜스'를 읽는 중인데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 폴 고갱을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고갱에 대해서도 관심이 늘고 있다.후에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감상도 자주 하고, 쉴레의 화집-은희경 소설에선가 나오던..-도 구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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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생문 (외) 범우문고 11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진웅기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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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 작가는 일본 사람이다. 나는 작가 중 일본 사람은 '빙점'의 작가를 처음으로 접했다. 그 다음 두번째로 접한 작가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였다. 책 표지가 '나생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몇 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었는데 그 중 '코'를 택한 까닭은 아주 독특한 소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종의 기형아인 젠치 내공. 그는 코가 순대처럼 가늘고 길다. 그런 특이한 상황을 주인공에게 부여한 다음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어서 젠치 내공의 행동과 심리적 상태가 아주 잘 드러난다. 이것이 주는 단점도 있지만, 한 인간의 심리변화를 잘 알 수 있어 나에게 인상깊었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속으로만 끙끙 앓는 주인공. 그 방법을 찾아 코를 짧아지게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행동하는 주위 사람들을 보고 무척 당황스러워한다. '이렇게 되면, 나를 비웃을 자는 없으렷다' 하며 거리를 나섰는데, 자신을 보고 전보다 더 크게 웃어대는 사람들... 정말 당황하고, 그 사람들이 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코가 길어지자 안도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되는 젠치 내공. 특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가을 바람에 기다란 코를 흔들거렸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이 단편 소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일본의 고전에서 소재를 따와 지은 것이라 한다. 그것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일종의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젠치 내공을 통해서 나의 모습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 낯선 작가에 대해서 흥미도 생겼다. 이 책을 읽고나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평범한 진리-약점에 대해 창피해하고 숨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대범하게 드러낼 줄도 알고 궁극적으로 그런 소심한 성격을 벗어나고 약점을 스스로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의 마음에도 소심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응어리가 있을 것이다. 때론 나도 그것을 드러내고 다른 이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짧은 소설을 읽은 후 나와 세상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대인관계. 그것이란 결코 쉽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과 인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말이다. 서로 상대방을 알게 되면서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닮는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한 것 같다. 속세가 싫어 떠난 사람도 있지만, 지금 당장 속세에 속한 나로서는 대인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 그것은 수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대중들은 유행에 잘 현혹되고, 다수의 힘을 이용해서 어느 한 사람을 파멸시키거나 그 사회의 변혁을 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정치인들이 대중심리에 대해 연구하고,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이 소설 '코' 속에서도 그런 대중의 심리와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짧은 소설이 나에게 이런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니 놀랍다.

그래서 장편 소설을 읽은 후에는 주로 줄거리와 장면이 기억에 남고, 단편소설을 읽은 후에는 그 소설을 읽은 후 나의 생각과 얻은 바, 인상이 더 기억되는 것 같다. 책을 읽은 후의 나의 느낌과 얻은 것이 잊혀지지 않고, 내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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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소년 떠돌이의 시 - 한국의 서정시
서정주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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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소년 떠돌이의 시(詩)

올해 2월 1일은 정말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다. 건조하고 투명한 시베리아의 머리카락이 갈기갈기 풀어헤쳐진 채 내 몸 -뺨, 이마, 다리-을 사정없이 휘감아댔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저 멀리 동산과 어디 나무 하나, 건물-바람을 막아 줄 만한 것- 하나 없이 논밭이 펼쳐져 있는 것. 주위에 농가로 보이는 집들이 흩어져 있는 풍경이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묻힌 곳을 찾아간다기에 무작정 데려가라 하고 따라나선 나였다. 선배들도 지리를 전혀 모르고 예전에 TV뉴스에서 보았다면서 어렴풋이 그곳의 지명을 기억하고 나를 데려온 것이었다. (아마 전북 고창군 선운리 혹은 심원이었을 것..)

버스에서 내려 그 추운데서 한 시간 가량 헤맸다. 이윽고 어느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거다'하고 올라간 곳. 양지바른 동산 중턱. 멀리서 보면 키가 큰 나무 한 그루만이 보이는 아담한 곳에 그 분의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무덤 봉분이 2개 나란히 있었는데 그곳에는 비석 하나 없었던 것이다. 초라하기도 했다. 아마 장사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보았다.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추고 나서, 추웠던 터라 무덤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바람이 세지가 않았다. 그곳에서 미당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미당에 유독 관심있어해서 책을 샀던 선배에게서 '80소년 떠돌이의 시'라는 시집을 빌렸다. 미당의 얼굴이 은은하게 명암처리가 되어있는 표지. 그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라 했다.

그의 노년기 때의 모습이 많이 녹아들어 있었다. 시의 소재들은 거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 정겨운 것들이 많았다. 주로 그의 생활과 생각에 관한 시들이었다. 특히, 아내와 단 둘이 지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겨울 어느 청명한 날, 아내가 창 밖을 내다보며 오늘은 관악산이 웃는다고 감탄하자, 시인은 아내에게 맞장구치며 아내더러 자기보다 더 시인이라고 한다. 자신은 대서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미당은 아내의 손톱에 떠오르는 초사흘 달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늙어 가는 슬픔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일까. 나는 그 말을 보고 내 손톱을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내 손톱에는 초사흘 달이 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그리도 달을 바라보며 왠지 좋아했던 것일까. 시인의 소박한 행복이 나와 비교되면서 잠시 비애감에 젖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창 선운사와 그의 고향 질마재에 관한 시도 있었다.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 모습을 묘사한 것, 그의 그리운 생가 모습. 그것이 잔잔하게 시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농촌적이고 향토적인 시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에 관한 시도 있었다. 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색한 영어 발음, 이국적인 사물과 지명들.. 이질적인 대상에 관한 시보다는 향토적이고 정갈한 시가 읽기도 좋고 나의 마음에 들었다.

詩人, 미당 서정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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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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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겉 표지, 그리고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 표지 안쪽의 작가의 약력.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었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 책.
그 책을 알게 된 것은 친구가 읽고 있던 책을 보고 호기심을 가진 것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꼭 무슨 책인지 물어보곤 했는데, 그 책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리고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 소설과 비교되는 것을 봐 왔던 터라 읽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컸다. 재미없고 딱딱하다는 친구의 말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상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좀 어려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생소한 중세 유럽 신학, 라틴어들, 성경 구절, 유럽풍의 단어들.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장의 반까지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각주들. 엮은이의 배려였다. 모두 머릿속에 담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때 확인하고 아는 것은 좋았던 것 같다.

<장미의 이름>은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의 묵시록에 맞추어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 어쩌면 3류 추리공포소설이 될 플롯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방대한 지식과 기법을 동원하여 아주 고급인 소설을 만들어냈다. 질릴 수도 있는 라틴어 경구와 중세 유럽의 중교 상황을 대변하는 수도사들의 언쟁, 그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드소’. 그의 ’관찰’ 후 회상이 이 소설의 전개 방식이 된다. 아드소의 개인적인 체험, 생각과 객관적인 정황, 사건 서술이 회상의 주인데, 만약에 ’장미의 이름’이 이런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을 택했다면 재미가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감이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줄거리를 머릿속으로 잡아나가며 꾸준히 책을 읽었다. 윌리엄 수도사의 그 번뜩이는 지혜, 생각, 그 시대 상황에서는 진보된 가치관 등은 특히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모든 흔적을 신중히 관찰하고 수사에 도움이 되게 했던 것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 그는 추리하여 문제의 핵심에 가까이 접근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말이 ’모든 흔적은 기호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관련된 철학이 들어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앞에서 말했듯이 연쇄 살인 사건은 성경의 ’요한 묵시록’에 맞춰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밝혀진다. 묘하게 그것과 맞아떨어지면서 범인은 그것을 이용해 수도원 내의 공포와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용의자 선상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런데 정작 범인 심판이 끝난 후, 진범이 밝혀진다.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가 그를 어둠 속에서 끌어낸 것이다. 맹인 호르헤 노수도사. 미로같은 장서관의 숨은 세력자, 그였다. 그는 평소 ’웃음’을 금기시하면서, 웃음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채식한 채식사를 자신의 신념 때문에 죽인 것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수도사들을 맹인의 몸으로 간교 혹은 직접 죽였다. 그가 진범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 노수도사와의 싸움 중에 장서관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그 수도원의 최대 자랑거리였던 장서관이 모조리 불타버리고 만다. 그곳에서 장서관의 의미는 단지 ’책을 보관하는 곳’, 그것이었다. 그만큼 귀중한 고서도 많았고 금기시하는 이국의 책도 많았다. 그런 장서관이 지옥같은 불에 의해 삼켜진 것이다. 타기만을 위해 기다려온 제단, 장서관 자체가 화형주라고 했다.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나는 라틴어와 접했다. 그것에서 알게 된 라틴어 경구를 가지고 친구와 서로 뜻을 해석하고 알아맞히기도 했고, 그 경구를 가지고 어떤 모르는 이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움베르토 에코 팬이 되어있다. 그 다음 타겟으로 정한 [푸코의 추]. 만만하지가 않다. 언제쯤 다시 그것을 붙잡고 읽을지는 의문이다. 나에게 새로운 지적 체험을 하게 해 준 <장미의 이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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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의 시 1
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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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옅은 주황색 글씨가 수직강하하면서, 그렇게 흘러내리지도 않고 딱 달라붙어있지도 않고 붕 떠있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박혀있었다. 서점에는 참고서를 사러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시집이 있는 쪽으로 빠져서 한참동안 둘러보고 있다가 이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사지 않았다. 그 대신, 사려고 했던 참고서만을 손에 쥔 채 서점을 빠져나갔다.

그 후 나의 생일이 왔고, 몇 주일이 지나서 이 시집이 나에게 왔다. 평소에 구석기라 불리우는 얼굴이 까만 친구 한 놈이 선물을 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서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놈은 속은 되려 깊고 서정적이다. 시를 써서 보여주는 것 하며 합평회를 할 때 답답하다고 내뱉는 그 모양이 그냥 겉으로 보는 느낌과는 다르다. 그래서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을 선물을 해 준 것이었다.

안도현 시인. 여기저기 대회에 나가면서 강연도 보았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편안함이랄까. 경직되지 않은 꾸미지 않은 사람. 시를 쉽게 쓰려고 한다는 시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를 하나하나 펼쳐 읽어보면 따뜻함을 느낀다. 그가 표제를 단 것처럼 이 시집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를 통하면 무난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해지는 느낌을 획득한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눈 언저리가 환해진다.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의 시 중 나는 빗소리에 관한 시가 인상깊었다. 빗소리를 이렇게도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구나. 치열하게 시를 쓰는 시인도 많지만, 이런 아기자기하고 생활감 있고 인간냄새가 나는 시도 좋은 것 같다. 매일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마주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안도현의 이 시집을 보고 손바닥 가운데서부터 피어오르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고 그 느낌을 타인에게 실천해봤으면 좋겠다. 그것이 집적거림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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